성석제 단편소설 0.성석제가 쓴 작가소개 1.조동관 약전 2.[자전소설] 홀림..1998 가을 문학동네 3.황금의 나날 4.이른 봄 5.해방-술 마시는 인간..1998 여름 창비 6.[강변야화-콩트릴레이]'우리동네' 7.소설 쓰는 인간 ======================================================================== 성석제가 쓴 작가소개 - 1960년 7월 5일, 미명에 태어났다고함. 아버지는 공무원으로 근무 중, 증조부를 여의고 난 후 귀향,읍내 시장에 서민금융(시장상인들을 상대로 한 신용조합의 일종)을 운영하는 한편 농사도 지었음. - 조부모, 종조모, 부모, 고모셋, 삼촌, 아홉 살 위인 형, 여섯 살 위인 큰 누이, 세 살 위인 작은 누이,머슴까지 합해 열세 명이 밥상에 둘러앉는 대가족. 3년 후남동생, 또 3년 후 여동생이 태어나 최고 15명분의 수저를 밥상에 놓아야 했음. 따라서 밥상이 생존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저절로,확실히 깨닫게 되고 밥상을 연모하는 마음을 평생 가지게 됨. - 스무 살 때까지 편식. 물고기,뭍고기를 먹지 않는 식성이어서 반드시 그것을 먹어야만 하는 다른 식구들에게 우호적인 대우를 받음. 최초로 돼지갈비를 먹은 것은 군대시절 휴가 때로 '야,이 놈들이 이렇게 맛있는 걸 저희끼리만 처먹고 살았구나.' 하고 바글바글한 옆자리 손님들에게 눈을 부릅뜬 적이 있음. - 67년 국민학교 입학. 여리고 청초한 처녀를 담임선생으로 맞아 사모하는 마음을 가누지 못함. 그해 겨울 선생은 결혼식을 한다고 학교에 나오지 않았음. 그때 딴 녀석들은 수업시간이 줄어들어서 좋다고 책상에 뛰어오르는 등 광란을 하며 환호했는데 홀로 집으로 돌아가는길, 십릿 길을 울면서걸었음. 다시는 여선생을 사랑하지 않으리라 결심. - 2학년 때 담임선생은 여성은 여성이었으되 영국의 대처 수상을 연상케 하는 강철 같은 의지와 철권의 소유자. 감히 딴 마음을 품을 수 없어서 책으로 관심을 돌림. 집에 있던 책들은 옥루몽, 금병매,수호전, 연산군 같은 소설에 그림으로 보는 이야기 성서 (이야기로 읽는 그림 성서였나?), 축산전서, 정체불명의 일본 추리소설, [사랑이 메아리 칠 때] 같은 저자 불명의 연애소설, 경향잡지(가톨릭 교회에서 간행하는잡지) 따위. 그걸 읽고 또 읽고 또 읽고 또 읽고 하다보니 학교에서 보고 배우는 이야기는 한 마디로 우스웠음. 따라서 학교에서 내내 실실 웃고 지냄. - 3학년 때 {아라비안나이트}와 세익스피어의 {햄릿}, 중고등학생용 자유교양신서를 만남. 읽고 또 읽고 또 읽고... 각 백번은 읽어 독서백편의자현이라는 말뜻을 체득하게 됨. - 4학년 때 백일장에 나가 [노을]이라는 제목으로 '노을을 보면 시집 간 누나가 생각난다'는 요지의 거짓말을 주워 섬겨대 당선있는 가작 상을 받음. 그때 누나는 고등학생으로 시집은 십 년 후에나 고려할 나이였음. 그 다음부터 갖가지 백일장에 반 대표, 학년 대표, 학교 대표로 나가게 됨. 거짓말 선수가 됐음. - 6학년 때 대학에 다니던 형이 군대 갔다가 사망. 온집안의 기대를 모으고 있던 형의 죽음으로 졸지에 장남이 됐고 무관심 속에서 누리던 은일과 평화의 시대는 종막을 고함. - 교내 폭력의 전성기에 거의 한 대도 맞지 않고 국민학교를 졸업. 졸업식 때 받은 상은 육성회장상인데 부상은 주판. - 73년 아버지와 형이 졸업한 중학교로 진학, 자전거로 통학했음. 한없이 긴 방죽을 따라 등교를 하다 보면 스스로 한심하고 슬퍼지는 때가 많았음. 여름에 부모님이 서울로 이사, 조부모와 나만 커다란 시골집에 남게 됨. 담임 선생과 세계관이 맞지 않아 불화, 도서실에서 책을 훔쳐나오다 적발된 이후 학교에 가기가 싫어 시냇가에 앉아 혼자 가르치고 혼자 배우는 시간을 보냈음. 그때 공책을 찢어 띄워보낸 종이배는 지금 어디에서 항해를 멈추었는지. - 2학년 봄에 서울로 전학. 말이 서울이지 구로공단의 배후지인 가리봉동이라는 변두리 동네는 수채가 질질 흐르고 비닐조각에 흙먼지가 풀풀 날리는 가운데 산업전사들이 사단급, 군단급으로 출퇴근을 반복하는 지옥같은 수용소였음. - 독서실이라는 해방구에서 변두리 동네 사춘기 소년들이 즐기는 갖은 장난을 다 배우고 익힘. 여자 목욕탕을 들여다보다 불때는 할아버지에게 잡혀서 머리에서 예배당 종소리가 나도록 맞았음. 복수를 위해 세 번을 더 떼지어 출격했으나 처음처럼 많은, 아리따운 여인들을 볼 수는 없었음. '나는 봤다!'고 목욕탕 벽에 낙서를 하는 것으로 복수를 마무리. - 76년 2월 중학교 졸업. 지옥구 졸업. 뺑뺑이(추첨)로 혜화동의 경신고등학교로 진학. 지금은 고인이 되신 은사(주호수 선생)을 만남. 매타작 전문가인 선생의 덕분으로 문예반에 들고 교지 편집이라는 걸 하고 1년 만에 문예반을 탈퇴하고 바둑도 두고 술도 마시고 선생이 압수해 집안에 쌓아둔 무협지도 읽고. 어릴 읽어둔 책들이 드디어 진가를 발휘, 40대의 성인과 대등한 사고를 하는 이상한 고등학생이 되는 데 성공하여 선생한테서는 한대도 맞지 않았음. - 연세대에 진학(정법계열).후에 법학으로 전공을 정함. 법학을 전공으로 한 것은 고시생들이 많아 출석을 잘 부르지 않는다는게 가장 결정적인 이유. - 기형도라는 인간을 만나 그가 나가는 사교 집단 연세문학회에 들어감. 교주는 문학이었고 교주 권한 대행은 술, 주정, 성원근(작고시인)의 철권, 시합평회의 난도질 등등. 성원근에게 한대도 맞지 않고 무사히 군대로 감. - 군대 시절 벗들과 수많은 편지를 주고 받으면서 글의 위대함에 대해 눈을 뜸. 파블로 네루다(칠레의 시인), [창작과 비평] 영인본,[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미술의 역사], [음악의 역사], [철학사], [전쟁사], [역사란 무엇인가]를 접함. - 84년 복학. 기형도의 인도로 교내신문인 연세춘추에서 주관하는 [윤동주 문학상] (시 부문)에 응모. 당선 있는 가작으로 입선. - 85년 독자적으로 다채로운 영역을 개척하던 끝에 시, 소설, 희곡,3부문에 응모. 당연히 당선될 줄 알았던 (그 전해 당선자가 졸업했으니까) 윤동주문학상에서 낙선. 그때 심사위원은 정현종. 희곡은 당선작 없음으로 낙선. 심사위원은 오태석. 소설([박영준 문학상])이 가작 없는 당선으로 간신히 체면 유지. 심사위원은 잘 기억나지 않음. - 86년 6월 월간 {문학사상}의 신인발굴에 시 [유리닦는 사람] 외 4편으로 등단. 졸업 후 출판사인 현암사에 취직. - 11월 출판사 사직하고 제주-해남-상주로 이어지는 순례 시작. 6개월 정도 절에서 생활(절 생활은 종교문제 때문이 아니라 식성 때문임). - 87년 겨울, 동양시멘트라는 회사에 취직. 홍보 일을 봄. - 88년 5월 결혼. 현재 1남1녀. - 91년 그동안 발표한 시를 모아 첫시집 {낯선 길에 묻다}(민음사)를 냄. 판매 실적 저조. - 93년 8월 해마다 거듭된 시도 끝에 직장을 그만두는 데 성공. 주특기인 놀기에 탐닉, 마냥 신나게 먹고 놀았음. - 94년 여름, 편서풍과 북태평양 고기압의 대결장이 된 서울 신림동 산자락 하숙집에서 악전고투 끝에 시도 소설도 산문도 아닌 이상한 글을, 미욱스럽게 책 한 권 분량이나 쓰게 됨. 그해 겨울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민음사)로 펴냄. 판매실적 저조. - 95년 1월 산문집 {위대한 거짓말}(문예마당)을 냄. 물어보나마나 판매 실적 저조. 계간 {문학동네} 여름호에 단편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 를 발표함으로써 소설가 행세를 하게 됨. 단편 [금과 은의 왈츠],단편 [첫사랑], 단편[이른 봄]을 발표하는 한편 장편 {왕을 찾아서}를 흑심을 가지고 씀. - 96년 2월 {왕을 찾아서}(웅진출판)드디어 출간. 그러나 또 판매실적 저조. 이래도 안되고 저래도 안 되면? 모르겠다. 6월 교통사고로 다리를 다침. 성한 왼쪽 다리도 노리는 인간들이 많은 세상에서 힘겹게 살고있음. 낫기만 하면 손보아줄 인간들 역시 많은 세상에서 야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음. - 단편 [새가 되었네], [황금의나날], 중편 [스승들]을 보태 96년 7월 첫 창작집 {새가 되었네}(도서출판 강)를 펴냄. 판매실적은 말하지 않겠음. - 중편 [어린 도둑과 40마리의 염소]('96 문예중앙 가을) 발표. 계간 {리뷰}에 장편 {왕의 인생} 연재 시작. - 97년 1월 짧은 소설(꽁트,자유단편, 엽편소설이라는 장르와 비슷하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서 뭐라고 이름붙이기 힘든 내 멋대로의 팬서비스)을 모은 {재미나는 인생}(도서출판 강) 출간. - 단편 [조동관 약전], [경두],[아빠 아빠 오, 불쌍한 우리 아빠],[이인실], [통속], [유랑], [고수], [칠십년대식 철갑],[비밀스럽고 화려한 쌍곡선의 세계] 등을 사방에 발표. - 97년 5월부터 7월까지 PC통신 하이텔에 장편 [궁전의 새] 연재 - 97년 6월 두 번째 창작집 {아빠 아빠 오, 불쌍한 우리 아빠}(민음사)를 출간. 판매실적 점차 호전. - 가을에 단편 [유랑]으로 제30회 한국일보문학상을 받음(공동 수상). - 최근작으로는 단편 [붐빔과 텅빔], [소설 쓰는 인간]. - 현재 원고노동자, 사과나무에 반한 자, 막걸리 잔에서 복숭아꽃 피기를 기다리는 자 등 스무 개 정도의 직업 내지는 직함을 가지고 있음. ============================================================================== 조동관 약전 1 똥깐의 본명은 동관이며 성은 조이다. 그럴싸한 자호(字號)가 있을 리 없고 이름난 조상도, 남긴 후손도 없다. 동관이라는 이름이 똥깐으로 변한 데는 수다한 사연이 있어 한마디로 말할 수는 없다. 다만 똥깐이와 한 시대를 산 사람들이 똥깐이를 낳고 똥깐이를 만들고 똥깐이를 죽이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일부로 평범한 사람 조동관을，자신들과는 다른 비범한 인간 똥깐이로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똥깐이 살다간 은척읍에서 세 살 먹은 아이부터 여든 먹은 노인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 불문하고 동관을 칭할 때 똥깐이라고 하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똥깐이 보고 듣는 데서는 아무도 그를 동관으로도, 똥깐으로도 부를 수 없었다. 똥깐은 이란성 쌍둥이의 동생으로 태어났는데 죽을 때까지 형 은관과 대략 일천 회 이상의 드잡이질을 벌였다. 그 드잡이질은 똥깐의 타고난 체격에 담력과 기술，자잘한 흉터를 안겨주며 그가 은척 역사상 불세출의 깡패로 우뚝 서는 바탕이 되었다. 은관은 성격이 비교적 온건하고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는 걸 좋아해서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이미 합기도 삼단，유도 사단，태권도 삼단의 면장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 결과 그에게 붙여진 별명은 <조십단>이었다. 나쁘게 발음하면 그대로 욕이 될 수 있으므로 사람들은 은관이 있는 곳에서는 절대 그 별명으로 부르지 않았고 없는 데서도 혹시 신출귀몰하는 그들 형제가 주변에 없나 살피고 나서 <똥깐이가 조씹다니하고 술 먹다가 전당포 주인을 깔고 앉은 사연> 등을 즐겼다. 그런 이야기가 은척읍 사람들에게 재밋거리가 된 것은 그때 은척에 살던 사람들 대부분이 텔레비전이나 신문，라디오를 보거나 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볼 돈도 없었고 볼 생각도 없었으며 볼 수도 없었다. 따라서 은관 형제의 이야기는 그들의 뉴스였고 연재소설이자 연속극이며 스포츠였고，무엇보다도 신화였다. 똥깐은 성장함에 따라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개망나니짓으로 명성을 쌓아가기 시작했는데 열다섯 살 때부터 외상 안 주는 집 깨부수는 일은 다반사요，외상으로 밥 먹고 외상으로 반찬 먹고 외상으로 오입하고 외상으로 차 마시고 게트림하고 외상으로 만화 보고 외상으로 다른 아이들을 두들겨팬 뒤 외상으로 약을 사주었다. 그 와중에서 읍내 사람들의 뇌리에 동관을 결정적으로 똥깐으로 각인시킨 일은 이른바 <역전 파출소 단독 점거 사건>이다. 똥깐은 언젠가부터 자신이 태를 묻고 터를 잡은 곳이 좁다고 느끼게 되면서 점차 활동 반경을 넓혀나갔다. 거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기차였다. 똥깐의 집은 은척의 근대화의 상징이라 할 만한 기차역 바로 앞에 있었다. 기차역 주변은 은척에서 가장 번화하고 시설이 잘된 곳인데도 불구하고 사시사철 수챗물이 질질 흐르는 도랑이 곳곳에 복병처럼 숨어 있었고 바지도 입지 않은 새카만 아이들이 누런 똥을 뻐득뻐득 싸대곤 했다. 비가 오면 진창이 되는 도로 옆에 야트막이 처마를 잇닿아 지은 가게들에선 매일 먼지와 파리가 날아다녔고 그 뒤 가난의 꿀물이 졸졸 흐르는 골목골목에서는 아침 저녁으로 이놈아，날 죽여라， 살려라 하는 고함과 악다구니，배곯은 아이들의 울음소리로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똥깐은 기차역 앞 석탄하치장 한구석을 본거지로 삼아 거기서 쪼그리고 앉아 화투도 치고 윷도 놀고 술추렴도 하다가 기차가 들어오는 소리가 나면 허리를 쭉 펴고 하품을 한 다음 어슬렁어슬렁 기차를 타러 갔다. 똥깐은 태어나서 한 번도 표를 산 적이 없었고 표를 살 줄도 몰랐으나 역무원들 누구도 감히 똥깐을 제지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 역무원이 은척에 살고 있고 처자와 함께 다만 며칠이라도 더 살아야 하는 한. 기차를 타면 똥깐은 일단 기차 통로를 오가는 행상에게서 외상으로 삶은 계란을 한 줄 받아들고 첫번째 칸에서 마지막 칸까지 천천히 시찰했다. 가끔 가난한 소매치기가 역시 가난한 승객의 주머니를 털다가 들켜서 조그만 주머니칼을 휘두르는 일이 있었고 술 취한 승객끼리 힘없는 주먹질로 서로의 코피를 터뜨리는 일도 있었지만 똥깐의 관심은 그런 데에 있지 않았다. 똥깐은 이미 여자를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중에서도 기차를 타고 통학을 하는 제 또래의 여학생들이 한동안 좋은 표적이 되었다. 생애를 통틀어 학교를 다닌 기간이 세 달도 안 되는 똥깐은 뒤로 머리를 질끈 땋고 풀을 먹여 빳빳하고 새하얀 칼라에 검정 교복을 입은 새침한 여학생들을 신기한 애완동물로 생각했다. 똥깐은 독사처럼 머리를 꼿꼿이 들고 통로를 지나가며 쥐구멍을 찾는 여학생들의 턱을 일일이 들어 감상하는 것을 잊지 않았고 그중 유난히 새침하고 도도하고 제 꼴값을 하려던 몇몇은 냄새 나는 기차 변소에 끌려가 난행을 당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소문뿐，누가 사실을 확인해 보랴. 그러나 똥깐은 곧 풋내 나는 여학생들에서 공단이 있는 인근 도시의 제사(製絲) 공장，신발 공장으로 출퇴근하는 스무 살 남짓한 성숙한 처녀들에게 관심의 눈길을 옮겨갔다. 처녀들은 주말이나 명절에 집에 다니러 왔다가 휴일 늦은 오후에 기차를 타고 도시의 기숙사며 자취방으로 돌아가곤 했는데 그런 처녀들로만 주말 오후의 기찻간이 꽉 차곤 했다. 도시풍의 번쩍이는 나일론 옷에 슬슬 화장을 하기 시작한 처녀들을 사냥하기 위해 똥깐은 주말이면 은척을 비웠다. 똥깐이 없는 주말에는 그의 형 조십단이 오토바이를 붕붕거리며 은척 읍내를 휩쓸고 다녔다. 하여튼 똥깐이 이 년 이상 주말을 기차에서 보내는 동안 정복한 진짜 처녀만 해도，호적상 처녀의 수는 훨씬 많았을 테지만，백 명이 넘는다는 전설을 낳았다. 2 그러나 하늘이 무심치 않아 천하의 처녀 사냥꾼 똥깐에게도 천적이 나타났다. 그런데 처녀 사냥꾼의 천적은 처녀가 아니었다. 언뜻 보아도 스무 살은 훌쩍 넘어 보이고 떠꺼머리 총각 백 명은 능히 그의 치맛속에 돌돌 말아 다닐 것처럼 보이는 그 여인은 은척 사람들이 구경도 못한 알록달록한 양산을 쓰고 촌놈 가슴을 활랑거리게 하는 요란한 화장품 냄새를 풍기며 똥깐의 팔에 매달려 한들한들 은척에 나타났다. 도시에서 뭇 사내깨나 홀렸을 듯，그러고서 뭇 사내의 손길에 농락당하여 골병이 든듯，닳고 때묻었으나 바람이 불면 날아갈 듯 약해 보이고 앙칼져 보이면서도 수심이 깃들인 눈초리의 그 여인이 왜 똥깐을 따라 은척까지 왔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여하튼 똥깐은 싱글벙글 웃으며 그 여인과 다정히 팔짱을 끼고 늙은 홀어머니와 덩치가 남산만한 제 형 은관이 사는 단칸짜리 방으로 들어갔다. 한동안 그 골목 특유의 악다구니 소리와 한숨 소리가 울려퍼진 후 똥깐은 들창이 달린 조그만 방에 신방을 차렸다. 홀어머니와 은관은 비루먹은 나귀를 팔아 나귀가 들어 있던 마굿간에 방을 들여 살게 되었다. 그러기를 몇 달이나 했을까. 주말이고 주중이고 기찻간이고 읍내고 간에 똥깐을 본 사람은 없었다. 매일 간장종지만큼의 코피를 쏟아가며 방안에서만 지낸다는 소문이었다. 똥깐이 보이지를 않으니 그전에는 그렇게도 똥깐을 꺼림칙해하던 읍내 사람들 사이엔 어쩐지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는 말이 돌기 시작했다. 변소 를 하루에 한 번 가는 게 정상이듯 하루 한 번 똥깐이 설치고 다니는 것을 보지 않는 것은 은척에서는 비정상적인 일이었다. 조십단이 부지런히 오토바이를 타고 읍내 구석구석을 헤집으며 나름대로 맹활약을 했지만 똥깐에 비하면 어림도 없었다. 날파리와 벌의 차이라고나 할까. 그러던 어느 날 사람들이 고대하던 대로，몇 달 동안의 고요와 평화가 모이고 썩어 부글부글 끓어오른 가스가 한꺼번에 활화산으로 솟구쳐 오르는 것처럼 똥깐이 포효하며 방안에서 뛰어나왔는데 그 전말은 이렇다. 시어머니가 될 뻔한 똥깐의 홀어머니가 똥깐이 낮잠을 자는 사이 며느리가 될 뻔한 여인에게 빗자루를 거꾸로 내민 게 사건의 시작이었다. - 얘야. 너는 메주 냄새 나는 어두운 방에서 매일 먹고 자고 놀고 하는 게 지겹지도 않니. 이리 나와서 빗자루질이라도 해보거라. 얼마나 몸이 상쾌해지는지 모른단다. 그러고도 미진하면 걸아이，씨팔. 안 그래도 구들장만 지고 누워 있으니 몸에 좀이 슬 지경인데 저 노인네가 노망을 했나，뭘 잘못 처먹었나. 오냐，잘됐다. 내가 이런 집구석 아니면 갈 데가 없어서 있는 줄 아나 보지. 야，똥깐아，빨리 일어나! 누나 간다잉? 그때 잠에 취해 있던 똥깐의 대답인즉. - 그래? 누나，잘 가아. 그 동안 즐거웠어. 또 만나. 그런데 그걸 달리 들은 사람이 또 있으니. - 이년이 오냐오냐 했더니 어디를 기어오르고 있어. 가긴 어딜 간다는 거야. 다리몽뎅이를 확 분질러버릴라. 엄마，한쪽에 좀 찌그러져 있어. 둘 다 입 다물어，안 다물어! 다시 또 낮잠 깨워봐. 그땐 줄초상날 줄 알어. 그러고선 다시 코를 골며 잠에 빠졌다던가. 그러나 고부 사이가 될 뻔한 두 여인 사이의 전운은 가라앉지 않았다. 시어머니가 될 뻔한 사람은 소리도 없이 방에 들어와 여인을 꼬집고 할퀴고 머리를 쥐어뜯었고 며느리가 될 뻔한 사람도 지지 않고 마주 손톱을 세워 덤벼들었다는데，경험이라는 면에서는 시어머니 편 이，날카로움과 힘에서는 며느리 쪽이 각각 우세를 차지해서 우열을 가릴 수 없는 고요한 싸움이 몇십 분은 계속되었다. 며느리는 며느리대로 얼굴에 멍이 들고 삼단 같은 머리카락이 한줌은 뜯겨나갔고 시어머니는 시어머니대로 이가 세 대 흔들리고 한동안 손을 쓰지 못할 정도로 드세게 팔목이 비틀리는 부상을 입었다. 그러고 나서 며느리는 며느리대로 짐을 싸서 짐이라야 기껏 가방 하나만큼도 안 되었지만，양산을 들고 밖으로 나가버렸고 시어머니는 목을 매달 끈을 찾아 밖으로 나가 한동안 똥깐의 집에서는 똥깐이 코고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아니다. 그 난리가 나도 모르고 잠을 자던 천하의 잠보 똥깐이 얼핏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들창으로 그 여자가 구슬픈 눈길로 방안을 들여다보는 것을 보았다는 말이 있다. 아니다. 구슬픈 눈길로 오래오래 똥깐의 방안을 들여다보는 그 여자의 꿈을 꾸었다는 말도 있다. 하여간 잠에서 깬 똥깐，언제나 옆에 있어야 할 허벅지를 더듬으려다가 손이 허전해서，또 혀처럼 심부름을 시켜대던 노모를 몇 번 불러보고는 대답이 없으니 허전해하며 하는 말. - 어어，잘 잤다. 그런데 이것들이 다 어디로 갔어? 그러곤 몇 달 만에 처음으로 문을 열고 나오니 눈이 부시고 어지럼증이 나서 몇 걸음 가기도 전에 폭삭 주저앉고 말았는데 그때 멀리 기차역 플랫폼에서 아른아른한 양산을 든 여인이 기차를 타고 있었더란다. 이상하다. 은척에서 내 허락받고 저런 양산 쓰는 여자는 하나밖에 없는데? 맞다, 똥깐이. 그대의 마누라가 도망친다! 똥깐은 그제야 사태를 짐작하고 전속력으로 기차를 향해 달려갔다. 뛰어가는 도중 평소에는 눈을 감고도 건너다닐 수 있던 수챗물 도랑에 발이 빠졌고 새로 역에 근무하게 된 신참이 똥깐이를 몰라보고 개찰구로 달려나가는 똥깐을 잡으려다가 그 냄새 나는 발에 턱을 얻어맞고 한방에 뻗어버리는 사소한 일이 있기도 했다. 서두른다고 서둘렀지만 똥깐이 기차에 당도했을 때 이미 문은 닫히고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똥깐이 환장을 하게 된 것은 달리기 시작한 기차 안에서 손을 흔드는 한 여인을 보고 난 다음부터다. 똥깐은 젖먹던 힘을 다해 뛰었지만 기차를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필생의 사랑을 잃고 화가 머리끝까지 솟은 똥깐은 대합실로 돌아오면서 역장이 애지중지하는 화분을 박살냈고 이어서，대합실로 돌아와 긴 의자 두어 개를 보기 좋게 뒤집어버렸고 이어서，매점에 들어가 제가 찾는 술이 나올 때까지 아수라장을 만들었고 이어서，술을 마시며 제가 왕년에 깨다 못한 성한 유리를 한 장씩 깨기 시작해 결국은 몽땅 다 깨버렸고 더 깰 유리창이 없자 거리로 진출했다. 늘 하듯이 웃통을 훌떡 벗고, 다 나와! 개애애애새끼들! 외치면서 길거리에 납작 엎드린 가게 유리창을 발로 차기 시작해서，몇 달 동안 걸렀던 일과를 하루 만에 한꺼번에 해치우려는 듯 큰길까지 가는 동안 가게란 가게에서 유리란 유리는 몽땅 깨뜨렸다. 그 여인이 그냥 곱게 갔으면 그렇게 까지 하지 않았으련만，그 여인이 어디서 배운 인사법인지 들창과 기차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미소를 짓고 손을 흔든 게 유리가 횡액을 만나고 유리 가게 주인이 횡재를 만나는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 아，기다리고 기다리던 똥깐이가 드디어 나타났다! - 더욱더 용맹스럽고 늠름해진 것 같군，우리의 똥깐이. 남의 유리가 깨졌을 때 가장 덕을 보게 될 유리 가게 주인과 늘상 파리를 날리던 철물 가게 주인은 그런 대화를 주고받았고, 가게 유리가 깨진 사람들끼리는 한숨과 눈물을 지으며 서로를 껴안았다. - 내 유리 누가 물어주나，응? 어쩌면 좋아. - 지나가는 강아지한테 물어달라고 해. 강아지한테 물리는 게 똥깐이한테 먹히는 것보다는 훨씬 덜 아플걸? - 그런데 신고를 한 게 언젠데 아직 출동을 안 하는 거야，이 망할 놈들은 - 오면 뭘 해. 누가 똥깐이를 당하겠어. 무적의 똥깐이를. 아무도 말리는 사람이 없었고 나서는 사람도 없었다. 그 당시 경찰은 골치 아픈 신고가 들어오면 전혀 엉뚱한 데로 가서 '어라，여기가 거기가 아닌가? 신고를 똑바로 해야지' 하고 시간을 보내다가 어슬렁어슬렁 파출소로 돌아와서 월급을 타가는 버릇이 있었는데 그날 역전 파출소 경찰들은 불운했다. 똥깐은 경찰이 신고를 받고 늑장부리며 준비를 하고 엉뚱한 데로 출동하기도 전에 역전 파출소에 유리가 많은 것을 알고는 바로 그 안으로 쳐들어갔던 것이다. 똥깐이 등장하자 늙은 경찰들은 몽땅 밖으로 도망쳐 버렸고 철없는 젊은 친구들이 방망이를 들고 몇 번 아래위로 흔들다가 곧바로 똥깐의 강력한 주먹과 발길질에 밖으로 나가떨어졌다. 미리 밖에 나와 있던 나이든 경찰이 젊은 경찰을 위로하며 하는 말. - 그러게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더러우니 피하는 게지. 진작 나왔으면 공매도 안 맞고 얼마나 좋아. 유리야 나중에 본서에 신청하면 안 끼워주겠어? 아이구，저거 경비전환데 저걸 그냥 한 주먹에 박살을 내버리네. 괜찮아，저것도 신청하면 돼. 그렇지? 드디어 본서에서 기동타격대 출동. 기동타격대는 긴급 사태를 대비해 젊고 유능한 경찰들을 오분대기조로 편성 운영하고 있었는데 오분대기조가 출동한 것은 사건이 벌어지고 나서 오십 분도 넘어서였다. 그나마 파출소 가까이로는 오지 못하고 마이크를 쥐고 '조똥깐! 좋은 말로 할 때 밖으로 나와라! 안 나오면 몸에 해로운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른다' 한 소리가 오분대기조 기동타격 출동조치의 전부였다. 그러나 똥깐은 다정하고 걱정스러운 그 소리마저 듣기 싫었는지 자신이 깬 유리창의 삐죽삐죽한 구멍에 목을 들이밀고는， '오냐，한 발짝만 더 가까이 와봐. 목을 확 돌려버릴 거야!' 하고 협박인지 예언인지 단호한 의사 표시를 했 다. 3 오분대기조 지휘관은 옆에 있던 경찰에게 물었다. - 그렇게 하라고 부탁해 볼까? - 그러면 더 안 합니다. 똥깐이가 누굽니까. 잘못 말했다가 찍히면 제 명에 못 죽을걸요. 말한 사람을 봐뒀다가 나중에 그 사람 목을 저기다 싸악，돌릴지도 몰라요. 지휘관은 자신의 목 주위를 만지며 떨리는 소리로 말하기를. - 그럼 어떡해，마냥 기다리는 거야? 그 경찰의 대답. - 그게 최선의 전략입니다. 이제 두고 보세요. 술 취했지，피 흘렸지 금방 잠이 들걸요. 오늘은 낮잠을 덜 잤다는 첩보도 들어와 있습니다. - 맞아. 내가 이때까지 들어본 건의 가운데 최고의 건의를 들었어. 당신은 정말 우리 기동타격대의 보배야. - 저야 뭐 주어진 환경 속에서 최선을 다하는 민중의 지팡이가 되려 할 뿐입니다요. 그렇게 그들이 서로를 아껴주는 동안 과연 똥깐에게는 잠의 여신이 빗자루를 타고 부지깽이를 휘두르며 달려왔다. 똥깐은 은척에서 최초로 조직된 기동타격대에 코를 골며 체포된 최초의 범죄자였다. 똥깐이 재판을 받고 감옥으로 갔을 때 읍내 사람들은 다시 한 번 경악했다. 은척이 낳은 유사 이래 최고의 깡패，천재 외상꾼，싸움꾼，호색한，트집잡기의 귀재가 은척 읍내에 군림한 지가 수십 수백 년은 되는 것 같았는데 똥깐은 소년범을 수용하는 교도소로 갔던 것이다. -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더니 은척을 열 번은 들었다 놓은 장사가 아직 소년이었단 말인가. 이제 똥깐이가 어른이 되면 은척에 유리는 하나도 남아나지 않겠네. 어떤 이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똥깐이 감옥에 가 있는 동안 길거리의 유리들은 발악처럼 매일 반짝이고 번쩍였다. 계절이 두 번 바뀌고 나서 똥깐은 보무도 당당하게 은척으로 돌아왔다. 사람들은 똥깐의 일거수일투족에 숨을 죽였지만 똥깐은 더 이상 은척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는 듯했다. 감옥에서 수백 수천 번 맹세한 대로 그 여인을 찾아 동에 번쩍 서에 반짝 전국을 누비기 시작한 것이다. 그 뒤로 몇 년，똥깐의 순애보가 은척 사람들의 가슴을 사정없이 적셨다. 똥깐은 그 여인의 고향이라는 절해 고도에서 그 여인을 기다리는 어부가 되었다…… 똥깐은 그 여인을 보았다는 사람의 말을 듣고 서울로 올라가 역전 창녀촌에서 여관 조바를 하며 그 여인을 기다렸다…… 똥깐은 또 그 여인의 육촌 언니가 하는 가게 일을 거들며 일년을 기다렸다…… 무보수나 다름없이 묵묵하고 성실히 일을 하며 오로지 한 여자를 향한 열정을 불태우는 똥깐에게 반할 수밖에 없었던 그녀의 육촌 언니가 정식으로 청혼을 했으나 거절을 당했다…… 똥깐은 또 그 여인과 닮은 여인이 몇 년 전에 다녀갔다던 나이트 클럽에 취직을 했다…… 낮에는 잠도 자지 않고 그 여인이 올지도 모르는 공원에 나가 앉아 있었다…… 건강과 잠버릇을 해치고는 홀연히 은척에 내려와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기차역 플랫폼에 나가서 그 여인을 기다렸다…… 이만하면 하늘이 감동하고 땅이 울 지경인데 그 여인은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그 여인으로서는 그럴 이유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마침내 문득 똥깐이 제정신을 차리는 날이 왔다. 그 순간 읍내의 유리들은 빛을 잃었고 은척 사람들은 한동안 발뻗고 자던 시절을 마감하게 되었다. 그가 정신을 차린 이유는 분명치 않다. 그의 형 은관이 그 무렵 결혼을 했는데 결혼한 여자가 지겨울 정도의 잔소리꾼에 한시도 감시의 눈을 늦추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은관은 노름에 빠졌는데 은관과 노름을 해서 딸 생각을 하는 노름꾼이 은척에 존재하지 않았고 존재할 수 없었던 고로 그는 늘 이기기만 했다. 상승(常勝)의 싱거움을 견디기 위해서 은관은 노름판에 차 배달을 나오는 다방 아가씨 가운데 말을 닮은 아가씨를 올라탔는데 하필이면 은관의 엉덩이가 들썩이던 그 시간에 그의 부인이 들이닥쳤다. 은관의 머리칼을 잡아챈 그의 부인은 은관의 신체의 일부가 다른 사람의 몸에서 빠져나오기도 전에 그 뿌리를 잡고 늘어져 어디까지 갔다더라? 그 건물 옥상까지 가서 온 읍내 사람들이 다 듣도록 고래고래 고함을 쳤는데，그 내용인즉 '어허，읍내 사람들이오. 여기 좀 보소. 이게 내 서방 물건인데 쥐불알만하지요? 이것도 잘 못 놀리다가는 이렇게 죽습니다이' 하고는 옥상 난간에 제 서방 머리를 박아서 피칠갑을 하게 만들며 노름판에서 돈 잃은 읍내 사람들에게 며칠은 입에 올리고도 남을 이야깃거리를 안겨주었다. 순전히 공짜로. 그 다음부터 은관은 그 좋은 노름도 여자 올라타는 일도 하지 못하게 되었는데 똥깐이 거기서 충격을 받은 것인지도 모른다. 4 그 다음. 세상에는 그 여자 하나만 있는 게 아니라는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누군가 똥깐에게 해주었다는 말도 있다. 어쩌면，세상에는 서른 살 넘은 도시 술집 출신의 병든 여자만 있는 게 아니라는 이야기도 곁들였을 것이다. 그 다음. 그녀가 떠나간 곳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바라보던 끝에 똥깐의 시력이 형편없이 떨어져 눈에 뵈는 것이 없게 되었기 때문에 똥깐이 똥깐으로 돌아왔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 다음. 똥깐이 자기에게 남은 시간과 힘, 어거지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초자연적인 깨달음을 얻었을 수도 있다. 이런저런 그 모든 것이 조금씩 똥깐을 똥깐으로 돌아오게 했을 것이다. 하여간 똥깐은 언제부터인가 과거의 천재적인 행각을 능가하는 짓을 하기 시작했다. 그 동안 사랑 때문에 허비한 시간을 벌충이라도 하려는 듯 하루도 쉬지 않고 도둑질， 외상，싸움，강탈，폭언，협박，부녀자 희롱，고성방가，노상방뇨，흥정떼고 싸움 붙이기 가운데 두세 가지를 실천에 옮겼다. 똥깐은 잠깐 사이에 다시 읍내 최고의 깡패，백수건달의 대명사가 되었고 그의 그림자만 비치면 우는 아이도 울음을 그치는 명성을 회복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면 도대체 경찰은 뭘 했고 뭘 하고 뭘 하려 했는가. 바로 그에 관한 이야기를 할 참이다. 똥깐이 당대의 깡패에 머무르지 않고 시대를 뛰어넘는 명성과 위엄을 획득하게 한 그 사건，조똥깐의 생애 마지막을 불꽃처럼 장식한 그 사건에 대하여. 무능하고 게으른 경찰을 비난하는 읍민들의 원성이 하늘까지 닿았을 때 문득 새로운 경찰서장이 부임해 왔다. 경찰서장은 부임 일성으로 '읍 전체에 만연한 공권력 불신 풍조를 불식하고 사회기강을 문란케 하는 악질 폭력 범죄를 적발，단호히 조치하는 동시，공권력의 권위를 회복하여 새 시대의 새로운 경찰상을 구현 하자'고 역설했는데 유감스럽게도 은척 출신의 경찰들 가운데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경찰은 몇 명 되지 않았다. 알아들은 사람 중에서 그렇게 해야겠다고 다짐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러다가 말겠지，하고 남몰래 고개를 살랑살랑 젓고 말았다. 어쨌든 유식한 신임 경찰서장은 부임을 기념하는 거창한 행사가 끝난 뒤，관할 지역 내의 경찰 간부를 대동하고 민정시찰 겸 근무기강 점검에 나섰다. 경찰서장은 정복에 번쩍거리는 견장과 훈장인지 뭔지 찰랑거리는 뭔가를 달고 있었는데 하여간 그는 번쩍거리고 찰랑거리는 걸 어지간히 좋아하는 사람이었던가 보다. 똥깐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역전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와 술을 대작하는 사람은 쌍둥이 형 은관이었는데 그 무렵 은관은 부인과의 전쟁에서 치명적인 패배를 당한 뒤라 꽤나 의기소침해 있었다. 형제는 <여자란 백해무익한 존재>라는 주제에 관해 오랜만에 의견 일치를 본 참이었다. 거기다가 낮부터 마신 술이 오 르자 두 사람은 거나한 기분으로 자신들 나름의 시찰을 나갔다.은관은 늘 하던 대로 오토바이를 탔고 똥깐은 뒤에 태워주겠다는 형의 제안을 가볍게 일축하고 게슴츠레한 눈을 뜨고 팔자 걸음으로 역전 파출소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역전 파출소 앞은 기차역으로 가는 길과 읍내를 관통하는 주도로가 만나는 삼거리였다. 신임 경찰서장은 검은 승용차에 탄 채 주도로에서 역전 파출소 쪽으로 오고 있던 참이었다. 그 뒤로는 정복을 입은 간부들이 따라오고 있었는데 온 읍내에 신임 서장이 왔음을 알리기 위해 워낙 천천히 움직였던 까닭에 많은 사람이 장례 행렬이 지나가는가 착각을 했다. 역전 파출소에 근무하는 경찰과 파출소장이 파출소 앞에 도열한 채 신임 경찰서장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광경이 은관의 눈에 먼저，그리고 약간 나중에 근시인 똥깐의 눈에 들어왔다. 은관과 똥깐은 평소와는 조금 다른 풍경을 의아하게 여기며 파출소 앞으로 접근했다. 그날 그들 두 사람은 오랜만에 아무 일도 벌이지 않았다. 반면 역전 파출소장은 은관과 똥깐이 자신들을 향해 오는 걸 알아채고는 사색이 되었다. 하필 전임지에서 철없는 호랑이로 소문난 신임 경찰서장이 시찰을 하러 오는 이때에 천하무적의 똥깐이 그의 쌍둥이 형 은관까지 대동하고 오고 있다니. 파출소장은 바람처럼 빠르게 똥깐 형제에게 달려갔다. 살기 위해서라면 젖먹던 힘까지 다 동원해야 하는 법. 너무 빨리 뛴 탓에 막상 형제 앞에 선 파출소장은 헐떡거리며 말을 꺼내지 못했다. 형제는 의아한 눈으로 헐떡거리는 파출소장을 바라보았다. - 아저씨? 왜 숨도 제대로 못 쉬고 그러슈? - 저，저，저，거시기…… - 아，왜 그러냐구? 뒷집 돼지가 알을 낳았소? - 하，하，하，자，네，들…… 파출소장은 멀리 떨어진 부하들의 몸짓에서 신임 경찰서장이 거의 당도했다는 것을 알아채고 더욱 초조해져서 '자네들 농담 솜씨는 날로 발전하는구만. 심심한 경의를 표하는 바일세. 그런데 말이야. 오늘은 날 살려주는 셈치고 잠깐만 어디 가서 공짜술을 먹든가 노름을 하는 게 어떤가. 지금 눈이 오려고 하잖아. 이런 날은 그저 뜨뜻한 구들장 지고 육백이나 치는 게 최곤데 말이야. 내 생각이 어때요? 그렇게 해주실래요?' 하고 늘어놓으려는 말의 십만분의 일도 하지 못하고 그저 헐떡이다가 말았다. 그러는 동안 경찰서장의 검은 승용차의 앞부분이 유서 깊은 역전 파출소 앞에 당도했다. 파출소장은 다시 두 주먹을 쥐고 전력을 다해 파출소 앞으로 달려갔고 똥깐과 은관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파출소장의 뒤를 따라 천천히 역전 파출소 쪽으로 향했다. - 전체 차렷! 서장님께 경례! 파출소장이 파출소에 당도하기 전에 눈치 빠른 차석이 구령을 내렸고 도열한 경찰들은 딱，소리가 나도록 거수 경례를 했다. 경찰서장은 유리문을 내리면서 물었다. - 소장은 어디 갔나? 평소 돋보기 없이도 신문을 볼 수 있다는 걸 자랑삼던 차석은 폭풍처럼 달려오고 있는 늙은 소장 쪽으로 눈을 돌리며 우렁찬 소리로 대답했다. - 지금 오시고 계십니닷! - 이 사람이 지금 제정신인가? 어떻게 상관이 시찰을 온다는데 자리를 비울 수 있나? 아무리 눈치 빠른 차석이라도 대답할 수 없는 건 대답할 수가 없는 법이다. 그때 브레이크 파열음이 나며，아니 구두 밑창 떨어지는 소리가 나며 파출소장이 당도했다. 그러나 파출소장은 똥깐 형제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서장 앞에서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비 오듯 땀을 흘리는 파출소장을 바라보던 신임 경찰서장은 지휘봉을 꺼내 자신보다 몇 해는 더 살았을 파출소장의 살찐 배를 꾸욱，찔렀다. 파출소장은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섰다가 경찰서장이 다시 배를 편하게 찌를 수 있도록 앞으로 다가서곤 했다. 그러면서 제발 그 배 덕분에 뒤에서 다가오고 있을 똥깐 형제가 신임 서장의 눈에 띄지 않기를 바랐다. 동시에 서장도 똥깐과 은관을 보지 않게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파출소장의 바람이야 어떻든 운명의 시간은 다가왔다. 왜，짐승들 가운데 수컷들은 자신의 영역에 오줌 똥을갈긴다거나 나무 둥치에 자국을 내서 자신이 지배자임을 표시하지 않는가. 그 안에 다른 수컷이 들어오면 누구보다도 예민하게 반응하고 본능적으로 공격한다. 서장도 똥깐도 한 지역의 지배자로서의 자각이 강했다. 이미 다른 수컷이 자신의 영역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경계심을 돋우고 있었다. - 야，저 아저씨들 뭐 하는 것 같냐? 재미있겠는데. 은관이 오토바이를 멈추며 경찰 아저씨들이 다 듣고도 남을 정도로 우렁차게 외쳤다. 똥깐은 코를 벌름거리면서 자신의 영역에 들어온 다른 수컷이 누구인가를 찾고 있었다. 지나가던 사람들, 서 있던 경찰，배를 찔리고 있는 파출소장 모두 은관의 목소리를 들었다. 어떤 사람은 눈을 질끈 감았고 어떤 사람은 처마밑 그늘 속으로 물러섰고 어떤 사람은 자다 말고 일어나 창문을 살짝 열었다. 어떤 사람은 눈을 반짝였고 어떤 사람은 귀를 쫑긋거렸다. 신임 경찰서장은 눈가를 찡그렸다. - 저놈이 지금 뭐라 하는가? 파출소장은 눈을 감았다. 그는 속으로 기도했다. 제발 그냥 지나가게 해달라고，부처님，공자님，예수님을 불렀다. 그러나 그때까지 파출소장의 기도를 들어주었던 모든 신과 성인이 그때만은 그의 기도를 못 들은 척했다. 똥깐이 게슴츠레한 눈을 더욱 가늘게 뜨면서 경찰서장이 타고 있는 검고 커다란 승용차 앞에 멈췄 다. - 야，차 좋은데. 음，아주 좋아. 똥깐은 진정으로 감격한 듯 차의 지붕을 툭툭 두드렸다. 그 차는 은척에서는 보기 드문 최고급 관용차로 자존심 강한 서장이 손수 매일 닦고 손보고 조이고 기름 치는 차였다. 그 우아한 몸에 똥깐의 곰발바닥 같은 손바닥이 닿더니 쓰윽 훑고는 움푹한 자리까지 만들었으니，그 차가 사람이라고 한다면 기절을 했을 것이나 차는 사람이 아니니까 기절 따위는 하지 않는다. 그 대신 서장이 유리문으로 고개를 빼고 호령을 했다. - 네 이노옴，이 무엄한 놈! 감히 본관의 관용차에 손을 대다니. '여봐라，이놈을 당장 무릎을 꿇리고 주리를 틀어라' 하고 말하고 싶었겠지만 서장에게는 그럴 기회가 없었다. 파출소장이 마지막 남은 충성심을 짜내 서장의 얼굴을 자신의 축축하고 살찐 배로 가렸기 때문이었다. - 서장님，위험합니다. 자리를 피하십시……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똥깐의 눈이 세모꼴로 변하고 코에서 거센 콧김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으니까. 눈치 빠른 차석은 기동타격대를 부르러 파출소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다른 경찰들은 추운 바람 맞고 발을 동동 구르면서 온다 만다 하면서 한나절을 보내게 한 서장에 대한 원망에다 '쉬어'라는 명령을 들은 바 없었던 까닭에 부동자세를 유지한 채 비교적 자유로운 눈알만 굴리면서 되어가는 꼴을 보고 있었다. - 너 지금 뭐라고 그랬어? 똥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솥뚜껑 같은 손이 파출소장의 허리를 돌아 들어가 신임 서장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 어，이거 왜 이래. 놔! 놔! 똥깐에게 멱살을 잡힌 다음에야，경찰서장 아니라 그의 할아비라도 읍내 사람들이 똥깐이에게 멱살을 잡힌 뒤에 보이는 의례적인 반항밖에 더하겠는가. 서장은 목을 캑캑거리며 차에서 끌려나왔고 훈장을 찰랑거리며 똥깐의 아래위로 들어올려졌다 말았다 했다. 그제서야 경찰들이 부동자세를 풀었다. - 놔요，놔! 놓고 얘기해요. - 참게，이 사람. 새로 온 서장님이시라네. 그 순간에도 경찰 본연의 임무를 다하는 침착한 경찰도 물론 있었다. - 읍민 여러분! 어서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 생업에 종사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어느새 구름처럼 불어난 읍민들은 그 말을 못 들은 척하고 서로에게 말을 걸었다. - 자네 점심은 먹었는가. 어떻게 여기까지 걸음을 했어? - 우리는 구경을 원하거든. 우리에게 오락을 주면 좋겠어. 눈치 빠른 장사치들도 한몫했다. - 엿 사요，엿. 고소한 깨엿，짝짝 붙는 찹쌀엿，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르는 후박엿! 일단 발동을 건 이상 싸움기계 똥깐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적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어떤 충고도 만류도 처세훈도 소용이 없었다. 똥깐은 서장의 넥타이를 잡고 멧돼지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서장은 목이 졸려 죽지 않으려면 충직한 사냥개처럼 똥깐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 뒤를 은관이 오토바이를 타고 따랐고 경찰들이 뒤를 이었고 읍민들이 뒤를 따랐다. 따라서 역전 파출소에서 기차역까지 수백 명이 달리기로 이동하는，은척읍 사상초유의 장관이 연출되었다. 5 선두에 선 똥깐과 서장，그리고 은관이 탄 오토바이가 철로를 넘어갔을 때 하필 하루 두 번 운행하는 열차가 눈치도 없이 달려들어와 경찰을 포함한 군중을 가로막았다. 군중들은 발을 구르며 기차가 출발하기를 기다렸다. 기다려봐야 소용이 없다는 걸 안 사람들이 하나 둘씩 기차 끝을 돌아 현장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상황이 끝나 있었다. 어떤 상황이 벌어졌던가. 똥깐은 서장을 수챗물이 흐르는 도랑에 처박았다가 수챗물이 얼어붙어 자신이 원하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는 것을 알고는，도랑 위에서 힘차게 날아오른 다음 서장의 가슴을 엉덩이로 깔고 앉음으로써 서장에게 평생 처음 겪는 수치심을 안겨주었다. 이어서，형 은관에게 함께 도약과 착지의 즐거움을 누리자고 권유，두 사람은 도랑 밖에서 손에 손을 잡고 공중으로 도약，나란히 서장의 몸에 엉덩이를 내려놓았다. 그게 서장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안겨주었다. 두 사람은 사람들이 몰려오는 소리를 듣고는 오토바이를 타고 흰 연기를 뿜으며 사라졌다. 물론 도망친 건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해치운 사람이 누군지도 몰랐고 관심도 없었다. 자신을 몰라보는，도시에서 온 건방진 녀석，차가 좀 괜찮다고 재는 인간을 혼내준 것으로 생각했다. 그 길로 경치 좋은 강가에 있는 조그만 할머니의 조그만 가겟방으로 가서 <집 나간 여자와 집 안 나가는 여자가 인생에서 차지하는 비중>에 대한 대화를 태연하고 심도 있게 나누고는 한밤이 되자 고래고래 노래를 부르며 집으로 돌아왔다. 오토바이에서 내리던 은관은 즉시 체포되었다. 너무 취해서 반항할 수도 없었고 반항할 마음도 먹지 않았다. '왜 이러는데?' 한마디 묻고는 자신을 체포한 경찰의 품에 쓰러져 코를 골기 시작했다. 똥깐은 쌍둥이 형보다 힘이 센 만큼이나 술도 더 셌다. 그리고 그의 명성은 형에 비할 수 없이 높았다. 자신을 향해 머뭇머뭇 다가오는 일개 분대의 경찰 가운데 몇 명은 때려눕히고 몇 명은 어깨를 짚고 뛰어넘어 산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후에 <똥깐이 바위>로 명명되고 <똥깐이 굴>로 이름지어지는 굴이 있는 바위는 읍내 전체를 굽어보고 있는 남산의 중턱에 있었다. 뭉툭히 솟아올랐다는 점 말고는 전혀 특별한 게 없어 이름 하나도 얻지 못했던 그 바위에 있는 굴 역시 공식적으로는 아무 이름도 없었다. 그 굴은 여관이 없는 시대에 여관이 없는 읍내에 살면서 여관에 갈 돈은 없으되 여관 가기를 갈망하는 무수한 청춘 남녀들의 밀회 장소였다. 올라가는 데 밥 한끼 먹을 시간이 걸리고 뾰족구두 신고서 올라가기에는 제법 가팔랐지만 그들，연인들의 열화와 같은 정열을 누를 수는 없었다. 그곳을 자주 이용하는 사람들 중에서 누군가 모포를 가져다 놓은 다음부터 연인들 사이에서는 <모포굴>이라고 불린 적도 있다. 똥깐이 한밤중에 그 바위까지 한달음에 달려 올라갔을 때는 누구도 없었고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무수한 남녀가 깔고 깔리는 동안 닳아빠지게 된 더럽고 얇은 모포는 있었다. 경찰은 한밤중에 범인을 추적하는 일이 용이하지 않다，아군끼리 오인할 수 있다，부상자가 속출한다，다른 일도 많은데 모든 경찰이 다 거기로 몰려가면 은척은 누가 지키나 등등의 갖가지 이유를 들어 추적을 포기했다. 똥깐은 주위의 나무 부스러기를 끌어모아 불을 피운 다음 모포를 돌돌 감고 굴 안에서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이웃 도시에서 빌려온 경찰견에 빌려온 기동타격대까지 동원된 대규모 추격전이 전개되었다. 추격대는 삼십 분에 걸친 수색 끝에 똥깐의 흔적을 발견했다. 똥깐이 있던 동굴에서 연기가 솟아올랐기 때문이었다. 바위로 올라가는 길은 너무 좁아서 두 사람도 같이 지나갈 수 없었다. 한 사람씩 가면 되겠지만 혼자서는 무서워서 못 가겠다는 게 모든 경찰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래서 지휘관은 빌려온 핸드마이크에 입을 대고 이렇게 외쳐야 했다. - 똥깐이，잘 잤나? 너는 지금 완전히 포위됐다. 항복하면 살려준다. 어서 두 손 들고 나와라. 잠보 똥깐은 버릇대로라면 열시까지는 자야 하는데 삼십 분이나 일찍 잠을 깨는 바람에 성이 날 대로 났다. 댓바람에 굴 밖으로 뛰어나오며 돌을 집어던졌는데 그게 마침 등을 돌리고 오줌을 누던 기동타격대 가운데 한 사람의 머리를 정통으로 타격했다. - 아이고메，나 죽네에! - 전방 두 시 방향 적 출현，소대 포복! 그때 남산은 물론 온 읍내에 다 들리도록 우렁찬 똥깐의 포효가 울려퍼졌다. - 야，이놈들아! 용기가 있으면 올라와 봐라! 올라와서 일대일로 붙어보잔 말이다! 기동타격대는 부상자를 후송하네，구르네，엎어지네 하면서 소동을 벌인 다음 작전을 변경했다. 잠과 술에서 덜 깬 은관을 데려온 것이다. 은관은 경찰이 적어준 종이를 보면서 떠듬떠듬 읽어 내려갔다. - 사랑하는 똥깐이. 엄마가 걱정한다. 나도 걱정이다. 우리는 네，여…… 염려 덕분에 무사히 잘 있다……. 아저씨，이 글자가 뭐야? - 빨자다，빨! 포승을 쥐고 있던 경찰이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은관은 이어서 읽기 시작했다. - 빨리 내려와서 자수해라. 우리도 언젠가는 오손도손，아이 씨，안 보여! 손도 시려워. 난 몰라! 그래서 혈육을 동원한 눈물겨운 설득 작전도 수포로 끝났다. 똥깐은 오 분에 한 번씩 온 읍내가 떠나가라 욕을 했다. - 야，이 ○물에 밥 말아먹을 놈들아……. 니 에미하고 ○해서 ○새끼 낳아서 다시 ○할 놈들아……. 오오，이 ○만 하는 놈들아……. ○물에 튀겨서 ○물로 식혔다가 ○물을 채워서 ○순대 만들어먹을 놈들아…… 6 차마 입에 담을 수도 없는 처절한 욕이었고 욕이 끝나는 순간마다 돌을 집어던졌다. 따라서 욕에 관심을 가지고 귀를 기울이고 있던 경찰 가운데 몇 명의 부상자가 더 나왔는데 다행히 맨 처음 부상당한 사람과는 달리 들것으로 수송할 것까지는 없었다. 다시 밤이 왔고 기동타격대는 야간 장비가 없어 야간 작전이 불가능하다는 작전계획을 짜고 내려왔다. 사흘째 되는 날，춥고 허기진 똥깐의 상태를 짐작한 기동타격대는 바위 아래쪽 움푹한 곳에 불을 피우고 고기를 구워대며 똥깐에게 심리적인 타격을 가했다. 똥깐이 바위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팔짱을 끼고 서 있는 모습이 목격되기도 했다. 그때쯤에는 온 읍내 사람들의 눈과 귀가 모두 남산 위의 못생긴 바위에 집중되어 있었다. 집중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 똥깐이가 대단하기는 대단해. 나는 이때까지 살아오면서 저렇게 웅장하고 다양한 욕을 들어보기는 처음일세. - 얼마 못 버틸걸. 사람이 욕만 잘한다고 살 수 있나. 입고 있는 것도 변변치 못하대. 거기 먹을 게 있겠나，덮을 게 있겠나. - 나는 똥깐이가 절대 그냥 내려오지는 않을 거라고 믿네. - 그냥 내려오지 않으면? 호랑이라도 잡아올까? - 꼴뚜기 사려，꽁치 사려어，밴댕이젓 사려 - 여봐요. 거 왜 남 장사하는 집 문전에서 비린내를 풍기고 그래? - 맞아. 하도 욕을 퍼부으니 온 읍내에서 욕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애들 교육은 어떻게 할지，원. - 그런데 말야，희한해. 난 하루라도 똥깐이 욕을 듣지 않으면 잠이 안 와. 몸도 찌뿌드드하고. 버릇이 됐나봐. 그 욕을 듣고 있으면 꼭 안마를 받는 것같이 시원해. 병원에 누워 있던 서장은 삼십 분마다 사람을 보내 당장 똥깐을 체포해 오라고 불호령을 내렸다. 그로서는 공직 생활 수십 년에 처음 겪는 망신이었고 똥깐인지 변소인지를 못 잡으면 수챗물에 내동댕이쳐진 체면이며 훈장이 평생 회복 될 것 같지 않았다. 따라서 똥깐이가 산에서 버틴 지 사흘째 되는 날 밤에는 핑계를 대는 데는 선수인 경찰들도 밤새 잠복 근무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똥깐은 굳세게 잘 버텼다. 잠옷이나 다름없는 옷을 입고 누더기나 다름없는 모포를 뒤집어쓰고 원시적인 무기인 돌로만 무장하고 타고난 욕설과 독기로. 마침내 그의 욕설이 그치자 읍내 사람들은 오히려 불안한 마음이 되어 하나씩 둘씩 남산으로 눈길과 발길을 옮기기 시작했다. 눈발이 희끗희끗 비치는가 했더니 삽시간에 폭설로 변했다. 눈은 그 동안 똥깐이 퍼부어댔던 욕이 퍼진 대기를 정화하고 욕이 내려앉은 땅을 덮으려는 듯 쉬지 않고 내렸다.눈사람인지 사람인지 구별이 안 되는 행렬이 남산 입구에서 바위로 올라가는 유일한 통로인 좁은 산길을 메웠다. 한없이 내리퍼붓던 눈이 문득 그치고，느닷없이 침묵과 고요가 은척을 엄습했다. 누구도 입을 떼지 않고 바람도 소리를 죽이던 바로 그때，그 순간. 아뿔싸，오호라，슬프도다，어쩔 것인가，똥깐의 죽음을 알리는 비보가 전해졌다. 그는 얼어죽었다. 자신말고는 아무도 없는 동굴에서，쥐뼈인지 비둘기뼈인지 작고 메마른 뼈 몇 개가 그의 발 주변에 흩어져 있었고 아주 가는 뼈 하나가 그의 입에서 멧돼지의 어금니마냥 튀어나와 있었다. 뻣뻣한 똥깐의 시체를 모포에 말아 들것에 싣고 내려오던 기동타격대 행렬은 말없이 눈을 맞으며 자신들을 지켜보는 눈사람의 행렬과 마주쳤다. 이 행렬은 저 행렬을 무언으로 비난했고 저 행렬은 이 행렬에게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뜻을 무언으로 전하며 한동안 눈을 맞고 서 있었다. 어쨌든 은척에서 태어나 은척에서 살다가 은척에서 죽을 사람들은 모두 한패였다. 아무것도 이해 못 한 사람은 은척에서 나지 않았고 은척에서 살아본 적도 없으며 은척에서 죽을 리도 없는 신임 경찰서장이었다. 그는 똥깐의 돌에 맞은 사람이 그 상처와 관계없이 몇 주 뒤 교통사고로 죽자 그 경찰을 기리는 비석을 남산의 바위 앞에 건립토록 했다. 비석 앞면에는 <경찰충령비(警察忠靈碑)>라는 큼직한 글씨가 새겨졌고 뒷면에는 아무개 서장이 은척의 치안을 위협하는 불량도배를 소탕하여 정의와 질서를 구현한 경위，그 소탕작전에 참여했다 장렬히 산화한 경찰 아무개를 기려 비를 세우는 데 읍내 유리 가게，철물점，어물전，양복점，술집，기타의 주인장들을 얼마나 고심하여 건립위원으로 위촉했는가 등등의 사연이 국한문 혼용체로 비뚤비뚤 적혀 있었다. 경찰서장은 그 비가 세워지던 날，울며 겨자 먹기로 돈을 내놓은 유지들과 경찰 전원을 참석시킨 가운데 거창한 제막식까지 지냈다. 그가 은척 경찰서장으로 재직하면서 이룩했던 최고의 업적은 바로 그것이었다. 그 외에는 한 일이 없었다. 똥깐이 화장터에서 한줌 연기로 사라지고 얼마 뒤 누군가 순직 경찰을 기리는 비석의 뒷면에 있는 경찰서장의 이름을 정으로 까서 지우고 <똥깐이가>라고 쓰고 난 다음부터 생겨난 일들을 적어본다. 경찰서장은 임기가 끝나기도 전에 부패와 독직 혐의를 받아 다른 사람으로 교체되었다. 그 혐의 가운데 하나는 아무개의 비를 오석으로 건립한다면서 주민들에게 돈을 걷은 뒤，조잡한 화강암으로 바꿔쳐 성금을 횡령한 것이었다. 남산의 못생긴 바위에는 <똥깐이 바위>라는 이름이 붙었고 그 아래의 굴에는 <똥깐이 굴>이라는 이름이 보태졌고，그 앞의 비석은 <똥깐이 비석>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훌륭한 깡패가 되려는 소년은 모름지기 그 바위，그 굴，그 비석으로 순례를 떠나야 한다는 전통이 생겨났다. 멋모르는 사람은 그 신성한 장소에서 똥깐이라는 말을 지겹도록 듣고 보다가 방뇨나 방분의 충동을 느끼게 마련이었다. 그걸 실천에 옮기다가 벼락에 맞아 제가 싼 똥을 깔고 죽은 사람이 생긴 이후에는 누구도 감히 그렇게 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멀지 않은 곳에 이동식 화장실이 생긴 것은 똥깐이 죽은 뒤 이십 년 만의 일이었다. 수많은 경찰서장이 오고 갔다. 그들은 조동관 사건의 전말을 듣고 가슴에 새겨 몸가짐을 바로했다. 경찰들 역시 가끔 남산에 있는 바위를 올려볼 때마다 똥깐이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까닭에 수준이 점차 향상되었다. 지금은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모범 경찰이 은척의 치안을 담당하고 있다. 똥깐의 이야기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달구어지고 이야기 속에서 다듬어져 마침내 그의 짧고 치열한 일생이 전(傳)으로 남기에 이른다. 그 이름은 조동관약전이다. 책마을 깊이 읽기/성석제의 〈호랑이를 봤다〉 하응백/문학평론가 무지무지하게 재수 없는 사람도 가끔 있다.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 는 사람, 하는 일마다 지지리 복도 없어 실패하는 사람. 열정과 인내로 일을 하지만 실패하는 사람. 그 사람은 일에 이판사판으로 달려들지만, 그 일은 곧 아사리판(?)이 되고, 결국은 개판으로 끝장난다. 성석제의 소설 〈호랑이를 봤다〉의 주인공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그 는 가난한 시골 농가에서 3남 6녀의 막내로 태어나서, 그럭저럭 학교 다니다 상경하여 직장을 잡고 한 십 년 월급 받다 때려치우고, 퇴직금 으로 증권을 하다가 건강식품 사업에 손을 댄다. 몇 달 만에 부도. 고향으로 도망 가서 흑염소 사육, 흑염소 중탕 사업, 오리 사육, 어린 돼지 족 수입 사업 등등을 하지만 모두 실패한다. 가 정은 풍비박산. 그렇다고 그는 여기서 좌절하지 않는다. 본격적인 무역 업에 뛰어든다. 처음에는 주로 수입을 하는데, 살찌는 약, 살 빠지는 약, 발모제, 탈모 제, 정력제, 정력 감퇴제 등이 그 품목들이다. 그의 장사 논리는 “정 력제의 수요가 있으면 정력 감퇴제의 수요도 있다”이다. 누가 정력 감퇴제를 찾나? 금욕을 해야 하는 종교인이나, 회교 국가로 장기 파견 나가는 회사원이나, 그 회사원의 부인이다. 하지만 이런 물품을 수입해서 전화비나 통관료나 대행료를 물면 남는 게 별로 없다. 그래서 그는 중국을 오가는 보따리 장사에 나선다. 그가 한국에서 가져간 물품은 중고 가전 제품과 사무기기. 그 제품들은 처 음에는 중국 사람들이 구매력이 없어 못 팔다가, 나중에 구매력이 생 길 만하니 새로운 중고 제품들이 들어와 경쟁력이 없어져 못 판다. 그는 싸구려 중국제 카펫도 수입하고, 심지어는 ‘파오’라고 하는 몽 고식 천막도 수입해서 팔려고 한다. 파오는 제작 단가가 싸고 쉽게 지 을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건조 지대인 몽고의 이동 가옥이라 장마철 엔 속수무책, 게다가 짐승 가죽에서 나는 냄새라니. 결국 그는 그 모든 무역업에서 쫄딱 망하고 ‘사단법인 대한민국 대표 명사 인명록 편찬 위원회’를 결성, 회장에 취임하여 인명록을 편찬한다. 그 일이란 게 짐작하겠지만, ‘인명록에 실어주겠으니 돈 내라 혹은 책 사라’이다. 이 사업의 결과는 뻔하지 않은가. 누가 이 사람을 이렇 게 만들었을까? 물론 그 사람 자신일 것이다. 허황한 욕심, 부정확한 시장 조사, 면밀한 사업 계획의 부재 등이 종합적으로 이 사람을 궁지 에 몰아넣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성석제는 이 사람의 곤궁한 삶을 비 유적으로 해석한다. 한 나그네가 산에서 호랑이를 만났다. 살기 위해서는 정신 없이 도망 쳐야 할 것이다. 옷이 찢기고 바위에 걸려 넘어져 피부에는 생채기가 나고 온 몸에는 피가 흐른다. 그러다가 구사일생으로 마을에 도착했다. 쫓아오던 호랑이는 없다. 나그네의 눈앞에 인자하게 생긴 노인이 나타 난다. 나그네는 안도감에서 울음을 터뜨린다. 한참을 슬피 운 나그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노인은 말한다. “자네, 호랭이를 봤구만.” 생각해 보면 주인공의 삶은 호랑이를 본 20세기 한국인의 삶이다. 일 제의 침략, 6·25, 분단, 군부 독재, IMF 환란…. 늘 무엇인가가 쫓아 오고 있었고, 우리는 죽을둥 살둥 아등바등 앞만 보며 달려오기 바빴 다. 여전히 마을은 안 보이고 머리 쓰다듬어줄 노인도 없다. 게다가 올 여름은 왜 이런지. 장마가 끝났다고 하더니 기록적인 집중 호우에 태 풍 ‘올가’까지. 우리는 아직 울음을 터뜨릴 때도 아니다. ======================================================================= 자전소설 홀림 아이는 차문을 열다 말고 멈칫한다. 아이에게서 스무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서 있는 한 아이를 본 것이다. 아이는 순식간에 그 아이에게 사로잡힌다. 그 아이는 보이 스카우트처럼 짧고 푸른 바지를 입고 한 손에는 아이스크림을 들었다. 그 아이 역시 무엇엔가 홀려 있는 듯, 아이스크림이 흘러내리는 줄도 모르고 어디엔가 시선을 고정한 채 서 있다. 아이는 아이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소리나지 않게 차문을 닫는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숲길에서 동족을 만난 짐승처럼 조심스럽게 아이의 뒤를 돌아든다. 아이가 홀린 아이는 홀린 아이 특유의 모습과 표정으로 사진에서 막 오려낸 것처럼 다른 풍경과 구별된다. 아이의 얼굴은 검게 그을렸고 눈이 크다. 머리를 짧게 치켜깎아서 그런지 붉은 귀가 막 돋아난 잎새처럼 쫑긋하다. 사내아이치고는 속눈썹이 길고 섬세하다. 다리 사이에 낀 가방은 낡았고 후줄근하다. 아이 역시 아이만할 때 아버지의 서류가방을 물려받아 책가방으로 가지고 다닌 적이 있다. 그 가방은 질 좋은 가죽으로 만들어졌고 이국적인 냄새가 났지만 아이는 선생들이나 탐을 낼 그런 가방을 가지고 다니는 게 부끄러워 그 가방을 가지고 다니는 동안 혼자 산길로 다니곤 했다. 아이가 아이의 가방이나 아이 그 자체에 홀린 건 아니다. 아이는 아이가 무엇인가에 사로잡혀 하던 일을 멈추고, 어쩌면 숨마저 멈추고 있는 정경에 홀렸다. 아이의 눈은 멍하면서 깊다. 습관적으로 멀고 아스라한 누군가를 보거나, 스러져간 무엇을 반추하느라 그렇게 된 것이라고 아이는 생각한다. 아이는 아이가 바라보는 방향을 살펴본다. 길가에서 멀지 않은 곳에 트랙터가 논을 갈아붙이고 있다. 아이가 아이만할 때는 기름 냄새를 풍기는 기계가 드물었고 간혹 불도저나 지프 같은 게 들어오면 사람들이 모여 구경을 하곤 했다. 그렇지만 아이가 그걸 보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플라타너스에 푸르고 단단한 열매가 매달려 있다가 바람이 불 때마다 작은 종처럼 흔들거린다. 아카시아 숲에서 코를 벌름거리게 할 만한 꽃향기가 풍겨나온다. 더 먼 곳에 도로와 나란히 철로가 누워 있고 철로변에 새로 깐 듯, 투명한 햇빛을 반사하는 자갈이 눈부시다. 철로 너머에는 자그마한 동네가 있고 붉은 지붕과 파란 지붕, 아무 색깔도 없지만 아무 색깔도 아니라고 할 수 없는 색깔의 지붕들이 눈에 띈다. 하지만 아이가 늘상 보는 풍경에 홀릴 이유는 없다. 어쩌면 아이는 날아가버린 새, 비행기처럼 아이가 아이를 보기 전에 나타났다 사라져버린 것에 사로잡혀 있는지도 모른다. 아이는 이리저리 시선을 돌리다 다시 아이를 바라본다. 아이스크림을 든 아이의 손은 전체적으로 뭉툭하고 손가락이 굵다. 아이는 아이에게서 눈을 떼어 자신의 손을 내려다본다. 도시에서 살아오면서 그는 자신의 손이 농부의 손처럼 투박하고 매듭이 거칠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다. 그때마다 자신은 농촌 출신이고 어릴 때는 눈 쌓인 산에서 나무를 해다 장에 팔아서 끼닛거리를 사야 했다고 농담을 했다. 사실 그는 어릴 때는 나무를 해본 적이 없다. 불장난을 치려고 삭정이를 주워 모은 게 고작이다. 그도 또래의 아이들이 제 몸에 맞는 자그마한 지게를 지고 솔잎을 긁거나 잔가지들을 꺾으러 갈 때 함께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지만 아이들은 그를 끼워주지 않았다. 동네에서 가장 큰 집에, 동네에서 가장 식구가 많은 집에 사는 아이의 걸음은 느리고 손재주가 없었다. 함께 하는 장난이나 칡 캐기, 이삭·감꽃 줍기, 콩·수박·참외·사과·복숭아·오이·무·밀·감자·고구마·자두·토마토·닭·돼지 서리, 진달래·산딸기·오디·깨곰·대추·감·밤·모과·머루 따기, 개구리·뱀·산토끼·꿩·메추리·하늘소·매미·메뚜기·꿩·산토끼·노루·오소리를 잡는 일에 어설펐다. 아이는 그래서 혼자 놀고 혼자 방학숙제를 하고 혼자 주전자를 들고 딸기를 따러 가야 했다. 다행히 아이의 집 안에는 배·모과·살구·복숭아·포도·대추·감·뽕 나무가 있었고 텃밭에는 갖가지 채소가 자랐으며 조부모·부모·삼촌·고모·형·누나·동생에 솜씨 좋은 일꾼까지 있어서 아이가 다른 아이들에게 끼워달라고 애걸할 일은 많지 않았다. 아이가 문득 손을 움직여 아이스크림을 입으로 가져간다. 아이가 움직이자 아이는 아이에게 홀려 있던 순간에서 풀려난다. 아이도 여느 시골 아이 같은 모습으로 돌아가 한적한 풍경에 섞여든다. 아이는 걸음을 떼어 아이가 아이스크림을 샀을, 길가에 있는 구멍가게로 간다. 구멍가게의 문을 열던 아이는, 누런 베니어판과 얇은 유리, 자그많고 닳은 손잡이로 이루어진 그 문이 어린 시절 자신이 이따금 드나들면서 사카린과 성냥을 사던 동네 구판장의 문과 같은 시대에 만들어졌을 거라고 생각한다. 60년대다. 아이는 그 문 안의 풍경이 구판장의 60년대와 크게 다르지 않았으면 하고 바란다. 아이는 문을 연다. 환갑을 넘긴 듯한 여인이 쪼개진 수박 사진이 인쇄된 부채로 파리를 쫓고 있다. 아이는 담배를 하나 달라고 한다. 여인은 느릿한 동작으로 담배가 있는 내실 쪽으로 몸을 돌린다. 아이는 진열대 안쪽에 놓인 탁자와 탁자 위에 놓인 그릇들, 그릇을 덮고 있는 또다른 그릇과 누런 주전자를 본다. 탁자 아래에는 좁다랗고 긴 의자가 놓여 있고 그 위에 백수(白首)의 사내가 간신히 의자에 몸을 얹은 채 코를 골고 있다. 탁자 위에 번져 있는 허연 얼룩은 그 사내가 아침부터 마셔대며 흘린 막걸리 자국일 것이다. 아이는 어린 시절, 막걸리를 사서 들에 나르던 심부름을 기억해낸다. 그때 막걸리는 동그란 주둥이만 제외하고는 온몸이 땅속에 파묻힌 독 속에 들어 있었다. 주전자를 가지고 가면 바가지로 퍼서 막걸리를 담아주었고 흘러내리지 않도록 시멘트 부대 종이, 돌가루 종이라고 불리는 누런 종이로 마개를 해주었다. 아이들은 들로 가다가 우물을 만나면 막걸리를 바가지에 반쯤 따라 사카린을 타서 마시고는 주전자는 우물물로 채우곤 했다. 술도가에서 가져오는 술은 원래 싱거웠는데 도가에서 가져오는 동안 도가 일꾼이 물을 타서 양을 늘리는데다 구판장 안주인이 다시 물을 타는 일이 예사여서 심부름하는 아이들마저 물을 타면 들에서 일하는 일꾼들은 원래 농도의 반의 반도 안 되는 막걸리를 마셔야 했다. 자신이 어린 시절에 그랬기 때문에 그런지 일꾼들은 아이들을 크게 나무라지는 않았다. 막걸리 심부름을 하고 나면 술에 취한 아이들은 논두렁을 베고 잠이 들기 일쑤였다. 그러나 아이는 좀처럼 막걸리 심부름을 할 기회를 가지지 못했다. 따라서 논두렁을 베고 논바닥을 담요로 삼아 잠을 자볼 수도 없었다. 어느 추수철에 아이는 최초로 다른 아이들처럼 막걸리 심부름을 하게 됐다. 그런데 그 막걸리는 구판장에서 받아온 게 아니라 집에서 담근 밀주였다. 학교를 다녀온 뒤 곧바로 심부름을 하게 되는 바람에 공복이었던 아이는 다소 많은 양의 막걸리를 타 마셨고 그 바람에 취해서 논두렁에서 구르기까지 했다. 그래서 주전자에서 막걸리가 반쯤이나 쏟아져서 아이는 그만큼을 물로 채워넣었다. 결국 일꾼들은 평소와 비슷한 농도의 막걸리를 마시게 되었다. 거나한 기분이 된 아이는 짚단을 베고 논바닥에 누워 잠이 들었다. 그때 일꾼 하나가 분풀이인지 장난인지 아니면 둘 다 겸한 것이었는지 몰라도 아이의 몸 위에 짚단을 몇 개 시옷 자로 걸쳐놓았고 그게 짚단을 세우는 줄인 줄 안 다른 일꾼들이 이어서 짚단을 세우는 바람에 아이는 짚단 속에 갇히게 되었다. 한참 뒤에 잠이 깬 아이는 처음에는 자신이 죽은 줄 알았다. 축축한 흙기운과 매캐한 흙냄새와 지독한 어둠, 술을 지나치게 마셨다는 자책감이 더욱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아이는 그때까지 죽음을 겪은 적이 없었다. 난 죽었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냥 누워 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기분 나빴던 아이는 팔을 휘저어 짚단을 밀쳤다. 짚단이 양쪽으로 쓰러지면서 은가루를 뿌려놓은 듯한 밤하늘이 아이의 머리 위에 펼쳐졌다. 아이는 그때 처음으로 아름다움과 공포가 혈연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한동안 별에 홀려 멍하니 앉아 있던 아이는 별똥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정신을 차렸다. 아이는 마구 뛰기 시작했다. 이십 분이 넘게 걸렸던 길이 오 분도 걸리지 않았다. 아이가 달음박질로 집에 이르렀을 때, 어처구니없게도 아이의 집에서는 불을 끄고 모두 자고 있었다. 아이가 없어진 것도 몰랐던 것이다. 죽었다가 살아 돌아왔다고 생각한 아이는 자신을 몰라주는 식구들이 너무 원망스러웠고 죽어라고 달려온 게 아까워서 다시 죽었다 치고 짚단 속으로 기어들까, 아니면 이 길로 집을 나가 평소에 다른 아이들이 ‘오입 깐다’고 말하는, 이웃의 도시로 가버릴까, 하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이웃 도시까지 가는 길은 백 리쯤 되었는데 그 이웃 도시의 이름은 ‘오입’이 아니었고 초등학생이 오입을 할 수 있는 매춘굴이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외설스러운 단어인 ‘오입질’의 어근인 ‘오입’에, 떠난다는 의미의 ‘간다’, 또는 알에서 깨어 엉뚱한 세상에 오입(誤入)한다는 의미에서 ‘깐다’는 은어를 일상적으로 사용했다. 실제로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오입을 갔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방학이 끝나고 나면 몇몇 책상이 비어 있었고 그 자리의 주인이 오입을 깠다는 소문이 퍼지곤 했다. 나중에 폭발물 사고나 익사, 전학으로 이유가 밝혀지기 전까지는 모든 부재는 ‘오입’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물론 실제로 오입 간 아이들도 있었다. 그 아이들은 기껏해야 오입한 역 광장에서 구두닦이를 하다가 선생이나 부모에게 귀를 잡혀 돌아오는 게 보통이었다. 작은 영웅들은 아이가 사는 동네에서는 보기 드문 작은 성냥을 주머니에 넣어가지고 왔다. 그 성냥으로 불을 일으켜 불장난을 하는 동안 오입의 경험을 설명하는 아이나 듣는 아이 모두 귀가 발갛게 달아올랐다. 어느 해 여름, 아이보다 한두 해 위의 나이인 세 아이가 오입으로 떠났다. 아이가 알기로 세 아이는 모두 가난하고 용감했고 각자 다른 세 아이의 지도자가 될 수 있을 만큼 결단력이 있었다. 그러나 각자 삼천 명의 합창단을 지휘할 수 있는 아이라도 아이는 아이였다. 철로를 따라 백릿길을 거의 다 가서 지치고 졸린 아이들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철로를 베고 누웠다. 새벽기차는 늘 오던 시각에 와서 아이들의 비쩍 마른 몸뚱이에 새로운 길을 내며 지나갔다. 그 아이들의 시신을 가마니에 담았더니 불과 한 가마니밖에 안 되더라는 담임선생의 목격담이 교무실에서 교실로 퍼졌고 그날 한 번이라도 오입을 생각해본 아이들에게 우울한 미소와 침묵이 전염병처럼 돌았다. 그때부터 아이들은 오입으로 떠나려면 조금 더 필연적인 이유를 생각해내야 했다. 아이 역시 그날 오입으로 가지도, 오입의 알을 까지도 못했다. 부모와 동생들 사이에 있는 틈으로 파고들어 잠을 청했을 뿐이다. 아이는 오입과 짚단과 별똥과 죽은 아이들, 돌아온 아이들이 가지고 돌아온 오입 산(産)의 작은 성냥을 생각하느라 첫닭이 울 때까지도 잠이 들지 못했다. 아이는 바로 그날, 자신이 죽음의 언저리에 다녀온 게 사실로써, 죽을 때는 누구나 혼자인데, 자신을 낳고 보살펴온 식구도, 제 아무리 따뜻한 이부자리도 혼자 죽는 것을 말리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오입을 깐 것과 마찬가지이며, 그 결과 어른과 아이의 중간에 있는 어떤 단계로 진입했다고 믿게 되었다. 어쩌면 아이의 기억은 과장되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 아이는 다른 사람들과 어린 시절에 관해 이야기할 때 종종 다른 사람의 기억을 빌거나 잘못 기억하거나 그렇다고 믿고 있는 것에 의지하는 자신을 발견한 적이 많았다. 아이는 아이를 지켜본 사람들이 기억하는 대로 내성적이고 착실하며 평범한 시골 아이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날 이후 아이가 달라진 건 사실이다. 아이는 자신의 능력 범위 안에서 제 나름의 오입을 가고 까기 시작했다. 아이는 종종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골방이나 다락에 엎드려 어른들이 아이들 눈에 띌까 감춰둔 책을 보기도 하고, 어두컴컴한 지하실에서 포도주며 국화주의 국화와 포도를 건져먹고 술냄새가 가시기를 기다리다 끼니를 놓치기도 했다. 마침 그 무렵 오입에 있는 학교로 유학갔던 형이 몸이 아파 집으로 돌아왔다. 형은 몇 달 동안 자리보전을 하고 누워 있었다. 누워서 벙어리 장갑을 뜨는 오빠를 위해 누이들이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다 주었다. 그 책이 무협지였다. 그때 무협지는 여자중학교 도서관의 서가를 차지할 정도로 장정이며 내용이 위의를 가지고 있었다. 아이는 곧 형과 경쟁적으로 무협지를 읽어대기 시작해 형과 어깨를 나란히 누이의 도서관에 있는 모든 무협지를 독파했다. 아이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소설을 쓰기도 한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아이는 비로소 다락방의 『사랑이 메아리 칠 때』나 『회전목마』에서 마루 한 구석의 『새농민』, 안방 선반의 『대망』 『수호전』 『옥루몽』 『금병매』 『그림으로 보는 이야기 성서』, 성당에서 발간하는 『가톨릭 소년』이며 『경향잡지』, 삼면의 벽을 빙 둘러 책꽂이가 세워진 새 방의 일어판 『축산전서』 『백만인의 의학』 『과수재배』 같은 실용서, 『흙』 『상록수』 『해가 뜨는 아침』 같은 농촌계몽 문학을 섭렵하는 잡다한 독서에서 벗어나 일관성 있는 독서를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병이 나은 형이 오입으로 돌아가는 바람에 아이의 일관적이고 체계적인 독서는 그것으로 끝나는가 싶었다. 어느 날 아이의 아버지는 아이를 데리고 친구가 운영하는 서점에 들렀다. 그 서점에 서점이라는 간판이 달려 있는 건 분명했지만 책을 팔기보다는 빌려주는 게 전문인 대본소였다. 아버지는 몰랐지만 아이는 서가를 채운 게 대부분 무협지임을 금방 알아보았다. 그러나 아이는 전면을 제외하고 천장까지 세워진 서가에 꽂힌 한자 제목의 무협지는 본 체 만 체하고 서가의 맨 하단을 채우고 있는 알록달록한 전과며 수련장, 어린이 잡지, 동화책을 가리키며 그 책을 빌려볼 수 있게 해달라고 아버지를 졸랐다. 그러는 동안 아버지의 친구는 자신의 친구와 함께 온 꼬마 손님이 미래의 최대 고객이 될 것임을 알아보았고 아이는 가게 주인이 자신의 정체를 알아보았다는 것을 역시 한눈에 알아보았다. 결국 아이와 가게 주인의 공모 속에 아이는 아버지가 연말에 한꺼번에 대본료를 지불하는 조건으로 원하는 대로 책을 빌려볼 수 있게 되었다. 아버지는 일단 거창하게 술을 한잔 샀고 책이 아이들의 품성에 미치는 영향에 관해 친구와 함께 오랜 토론을 벌였다. 아이의 아버지는 그렇게 함으로써 아이를 위해 동화책이나 만화책을 사줄 수 없는 자신의 안타까운 입장을 완화해보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먹고사는 문제가 최우선이었고 아이들은 교과서만으로도 충분히 인격을 함양할 수 있다고 믿는, 아니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었던 농촌에서 동화책이란 호롱 기름이나 낭비하게 하는 사치품이었다. 어른들 생각이야 어떻든 아이는 환호하며 무협지의 세계로 뛰어들었다. 아이가 한꺼번에 댓 권이나 되는 무협지를 가방이 뚱뚱해지도록 빌려와서 새 방에 들어가면 밥 먹을 때도 좀처럼 나오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식구들은 아이가 보이지 않아도 으레 집 안 어디에 있으려니 여기게 되었다. 아이는 발바닥부터 머릿속까지 쥐벼룩에 물려가며 남의 나라의 영웅들이 벌이는 초인적인 사투에 빠져들었다. 무협지는 아이를 대금나수(大擒拏手)로 목덜미를 집어올려 격산타우(隔山打牛)의 수법으로 나무 위로 날려 보낸 뒤, 검화(劍花)와 검기(劍氣)와 어검술(御劍術)의 신기로 넋을 빼고 답설무흔(踏雪無痕)의 초절한 경공으로 머리는 있되 꼬리는 보이지 않는 신룡처럼, 도사처럼, 화상처럼, 은사(隱士)처럼 자재로 변신해 보였다. 아이가 그 서점에 있는 무협지 전성시대에 발간된 무협지를 다 읽는 데는 이 년이 걸리지 않았고 살기 어린 무협의 세계와 다름없이 강퍅한 환경에 내던져진 중학교 시절에 이르기까지 무협지는 아이의 언더그라운드이자 오버그라운드였다. 아이는 담배를 받아들고 돈을 치른다. 어느새 가게 여주인처럼 아이의 표정도 무표정해졌다. 가게를 나와 담배를 꺼내 물던 아이는 아이스크림을 들고 있던 아이가 길을 따라 걸어가고 있는 걸 본다. 아이는 공을 몰고 가듯 바닥을 툭툭 차며 걸어가고 있다. 그때마다 아이의 한쪽 어깨에 걸려 있는 가방도 흔들거린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인가. 하지만 아이 외에는 학교에서 돌아가는 아이들이 보이지 않는다. 열두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면 하교때라고 할 수도 없다. 아이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그는 아이가 걸핏하면 조퇴를 일삼던 자신의 후배라고 생각한다. 아이 역시 조퇴를 하고 혼자 집으로 돌아가는 길의 꿀 같은 고독을 즐긴 적이 있다. 나란히 줄을 이루어 학교로 가고 줄지어 소풍을 가고 조회시간이면 줄서서 박수를 치고 줄줄이 좌로, 우로 뛰고 걷고 책상 줄을 맞추는 법부터 가르치는 학교는 줄이라면 줄넘기에도 진절머리를 내는 아이에게 처음부터 맞지 않았다. 아이는 한없이 늘어선 줄에서 벗어나기 위해 거짓말을 배웠다. 선생님. 할아버지가 문중 제사에 가야 한다고 빨리 오라셨어요. 전화가 없던 시절이었다. 아니 있다고 해도 아이의 할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아이를 집안 행사에 데려간다는데 그게 사실인지 물어볼 선생은 없었다. 아이의 할아버지는 공부에는 귀신인 형과 천재 누나를 손자로 둔 덕분에 학교 선생들 사이에 잘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아이는 다른 아이들의 부러운 눈길을 받으며 일찍 학교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아이는 서점에 들러 무협지로 가방을 채운 뒤, 발로 공을 몰 듯 바닥을 툭툭 차며 걸었다. 그런 날은 학교에서 집으로 가는 길이 끝없이 멀기를 바랐다. 그런 바람이 아이를 길에서 잠이 들게 했는지도 모른다. 아이는 집으로 돌아가는 조용한 길 위 작은 그늘 속에서 배가 불룩한 가방을 베고 잠이 들곤 했다. 잠에서 깨면 하루가 지난 듯, 혹은 한 해가, 한 생애가 지난 듯 아이는 스스로의 나이테가 많아진 것을 느끼고는 가볍게 진저리를 쳤다. 꿈속에서 새로운 삶을 살다가 잠에서 깨어 부질없이 현생으로 돌아오는 『구운몽』의 주인공처럼. 그렇다. 삼십 년 이상 아이를 아이로 붙잡고 있는 힘은 그때의 꿈 없는 잠에서 나오는 것 같다. 그 시절만 해도 아이는 아이가 틀림없었다. 하지만 길에서 자고 일어나는 것을 되풀이하면서 아이의 내부에는 무엇인가 다른 존재가 자라나기 시작했다. 그 존재는 아이에게 말했다. 네게 어울리는 건 최소한 서른 살 먹은 사내야. 너는 더이상 배울 필요가 없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아이가 나중에 읽게 되는 ‘자유교양문고’ 시리즈에 나오는 공자님 말씀―삼십이립(三十而立)이란 말을 알았던가. 그건 확실하지 않다. 누군가에게 들었을 수는 있겠다. 예컨대 아이가 학교 가기 전, 밥을 먹으면서 듣던 라디오 연속극 〈자고 가는 저 구름아〉―송강(松江) 정철(鄭澈)의 일생을 소설로 구성한 박종화 원작에 성우 구민이 콧소리를 섞어 일인다역을 하는―에 그런 말이 나왔는지도 모른다. 또 할아버지가 늘 뒤통수에 부스럼을 달고 다니던 일꾼을 꾸짖을 때 쓰던 ‘사나(사내)가 사나 행세를 해야 사나 대우 받고 사나 몫을 받지’라는 가내의 이언(俚諺)에 그런 뜻이 숨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아이가 평소에 무협지에서 가문의 복수 따위에 집착하는 쪽 빠진 스무 살짜리 주인공보다는, 천하를 주유하며 행협(行俠)하는 삼십대 사내를 이상적인 주인공으로 상정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하여튼 아이는 어느 날 자신에게서 벋어나온 게 분명한 낯선 가지와 그 가지에 매달린 차갑고 푸른 잎사귀를 보았다. 그 어느 날은 아이가 열두 살 나던 해에 있던 여러 날 가운데 하나였다. 아이는 그 가지를 다른 사람에게는 비밀로 했다. 오래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가지는 더욱 굵어졌고 잎사귀는 무성해졌다. 마침내 가지는 자신을 지켜보는 아이의 거죽을 뚫고 뛰쳐나가 바깥에 그 존재를 과시하려고 했다. 어느 겨울 밤, 아이는 아버지가 모는 자전거 뒤에 타고 집으로 돌아오고 있다. 아버지는 읍내 친구들과 성당 앞 선술집에서 막걸리를 한잔 걸친 터라 기분이 무척 좋은 듯하다. 아이는 오르막길에서 아버지가 거칠게 내쉬는 숨소리를 들으며 자신이 아버지의 뒤에서 자전거를 타기에는 너무 무거워졌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러나 아버지는 자전거에서 아이를 내리게 한다든가, 내려서 자전거를 끌고 간다든가 하지 않고, 스스로와 내기를 하는 듯 힘겹게 자전거 페달을 밟아 마침내 집이 바라다보이는 제방 위에 선다. 거기서 아버지는 자전거를 멈추고 후우, 하고 긴 한숨을 내쉰다. 그 한숨은 아이가 아동용 희곡집 『나비로 날아간 소년』에서 병에 걸려 골방에서 내내 신음하며 바깥의 푸른 하늘 아래에서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나비를 그리던 소년이 흰 나비가 되어 날아갔다는 이야기를 읽고 난 뒤, 사람들은 왜 이렇게 슬픈 이야기를 만들까, 만들어서 책으로 내고 그 책을 대본으로 아동극(兒童劇)을 만든다고 미리 읽게 할까, 도대체 눈물이 나도록 슬픈 이야기를 써서 유명해진 사람들은 어떻게 생겨먹었을까, 안 그래도 이 세상에는 힘든 일이 많은데 무슨 까닭으로 슬픔을 더하고 자아내고 아픈 데를 후벼 파가며 슬프게 살까, 아아 모르겠다 하고 아이가 메주덩이 뒤로 책을 내던지며 내쉰 한숨 소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긴 한숨 소리가 끝나자 아이는 아버지를 부른다. 아버지. 왜. 저 내일부터 학교 안 가면 안 돼요. 아버지는 잠시 모든 동작을 멈춘다. 아이에게 그 일섬(一閃), 일순(一瞬)의 시간이 일생처럼 길게 느껴진다. 이윽고 아버지는 입을 연다. 그게 무슨 소리냐. 아이의 입에서, 아니 아이에게서 뻗어나온 나뭇가지에서 아이가 걷잡을 수 없이 빠르고 거세게 말이 흘러나온다. 학교에서 배우는 게 너무 시시해요. 다 아는 내용이거든요. 우리집은 학생이 너무 많아서 공부시키느라 아버지도 힘드시잖아요. 저라도 학교를 그만두고 독학을 해서 대학까지 가면 집안에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독학을 하겠다는 발상은 나뭇가지가 아니라 아이의 생각이다. 앞으로 남은 학년에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줄 맞출 일이 생각만 해도 끔찍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말이 없다. 자전거를 세우고는 제방 아래로 내려갈 뿐이다. 아이는 아버지의 온기가 남아 있는 자전거 안장을 붙잡는다. 겨울 바람이 아이가 살고 있는 동네 뒷산의 가운데 움푹한 곳―아이들이 똥고개라고 부르는 곳을 넘어 가늘고 기다란 채찍처럼 낡고 앙상한 자전거를 휘감는다. 아이는 눈을 감는다. 눈을 감고 걸을 때처럼 넘어지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생겨난다. 아이는 눈을 뜬다. 금방이라도 바람에 자전거가 넘어질 것 같다. 오줌을 누러 간 줄 알았던 아버지는 아이의 손이 싸늘하게 식도록 돌아오지 않는다. 아이는 자전거에서 내리고 싶다는 생각과 제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갈등에 시달린다. 하지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고 몸을 조금씩 뒤척일 뿐이다. 하늘엔 아기의 눈 같은 별이 총총하다. 냇가 건너 아이가 사는 동네에 켜진 불빛이 까물거린다. 컹컹, 하고 개 짖는 소리가 들려온다. 하루, 한 달, 한 세월이 지난 듯, 한참 만에 돌아온 아버지는 자전거에 다시 올라탄다. 씨익씨익 소리를 내며 자전거 페달을 밟던 아버지는 끝내 아이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다음날 아이는 〈자고 가는 저 구름아〉가 끝나도록 숟가락을 놓지 않는다. 보통 때는 〈자고 가는 저 구름아〉에서 출연 구민, 이라는 말을 듣고 가면 지각이다. 집안의 다른 학생들―초등학생 둘, 중학생 둘, 고등학생 하나, 초등학교 선생 하나는 이미 학교로 가고 없다. 아이는 〈자고 가는 저 구름아〉가 끝나고 새로운 프로그램이 시작되어서야 느릿느릿 숟가락을 놓는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이에게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없다. 아이는 마루로 나와서 오늘 무엇을 할까, 뒷산에 솔방울을 주우러 갈까, 중얼거리며 기지개를 켠다. 그러나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는다. 여자들은 설거지를 하고 할아버지는 사랑방 문을 닫고 닭은 조용히 똥을 싼다. 아이는 마당에 내려서서 앞산에 연을 날리러 가나, 뒷산에 솔방울을 주우러 가나, 하고 중얼거린다. 그제서야 마당에서 자전거 꽁무니에 도시락을 매달던 아버지가 아이를 돌아본다. 너 왜 아직 학교에 안 갔어. 아이는 그 순간 난생 처음 아버지에게 배신감을 느낀다. 어제 그렇게 알아듣도록 얘기를 했건만 아버지는 아침에 술이 깨자 그 중요한 이야기를 몽땅 잊어버린 것이다. 아니다. 아이는 아버지가 어제의 이야기를 잊어버린 게 아니라, 술에 취한 채로는 제 나름의 인생을 살기로 결심한 한 사내가 사내 대 사내로서 아버지에게 한 말에 당장 대답하기 곤란하니까, 일부러 아침까지 기다린 것이라고 의심한다. 네가 그렇게 잘났으면 온 식구가 보는 앞에서 다시 한번 네 의견을 개진하고 입장을 천명해보라는 게 아니겠는가. 아이는 대문으로 향하는 아버지를 따라간다. 아버지. 왜. 저 오늘부터 학교 안 가도 되잖아요. 무슨 소리야. 부자의 목소리는 각각 다른 이유로 나직하다. 아이는 다른 식구들이 들을까봐, 아버지는 자신의 아버지가 있는 사랑방 앞이어서 목소리를 낮춘다. 어제 말씀드렸잖아요. 뭘. 학교를 가도 배울 게 없다고요. 허허, 얘가 아침부터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나. 당장 가방 들고 나오지 못해. 아버지는 눈을 부릅뜬다. 아이는 어깨를 떨며 돌아선다. 이를 물고 어제 집에 와서 풀지도 않은 가방을 든다. 아이는 마루 끝에 놓인 도시락도 본 체 만 체 돼지 우리를 살피는 아버지의 등뒤를 지나 대문을 걷어차며 밖으로 뛰어나간다. 뛰면서 아이는 생각한다. 식구들 보는 앞에서 젊은 아버지의 건망증을 탓하는 짓은 아버지와 똑같은 수준의 인간임을 보여줄 뿐이다. 조금 더 고차원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하는 게 좋겠다. 아이는 집에서 빤히 내려다보이는 동네 우물가로 간다. 가방을 던지고 네 활개를 벌리고 눕는다. 곧 동네 아낙들이 설거지를 하러 나올 것이다. 아이가 누워 있는 것을 보고 놀라서 집에 알릴 것이다. 조금 더 빨리 온다면 아직 동네를 벗어나지 않은 아버지의 귀에 아이가 최선을 다해, 갈 필요도 갈 이유도 없는 학교에 가다가 우물가에 쓰러졌다는 비보가 들릴 것이다. 그러면 집에서 온 식구가 버선발로 뛰쳐나오고 그중에서도 죄 많은 아버지가 아이를 업어야 할 것인데, 아이는 더 무거워지라고 온몸에 힘을 주면서 죽어도 학교에 가야 한다고 울먹일 것이다. 왜? 학교에 가야 하나마나한 숙제를 안 한 대가로 매도 맞고 친구들과 어울려 계단의 구리를 빼내 엿을 바꿔먹을 수 있고 줄을 서서 쉰 냄새가 나는 급식빵을 얻어먹은 뒤 식중독에 걸릴 테니까. 그러면 온 식구들, 특히 아이가 독학으로 서울신문의 한자를 읽어내는 것을 보고(그 독학의 주요 텍스트는 할아버지가 즐겨보는 『금병매』와 『연산군』 같은 대하·고전·염정 소설에 무협지이지만) 학교에 보내느니 차라리 집에서 천자문을 가르치는 게 낫겠다고 하던 할아버지가 몸이 낫고 제정신을 차려야 학교를 가지…… 학교가 뭔데 애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나…… 그까짓 학교 아예 가지 마라…… 이렇게 나올 것이다. 그러면 아이는 못 이기는 체하고 학교가 지상에서 없어질 때까지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런데 우물가에 맨 처음 도착한 아낙은 동네에서 가장 과묵하고도 늘 바쁜 사람으로 뉘집 아이가 누워 있는지 자고 있는지 공부를 하는지 각본을 짜는지 아랑곳하지 않고 설거지에만 열중한다. 그 다음에 도착한 아낙은 아이가 가장 싫어하는 ‘떠들네’라는 별명의 아낙인데 오직 떠드는 것에만 관심이 있을 뿐, 아이가 어떤 상태인지 뭘 원하는지 앞으로 어떤 인생을 살 것인지에 관해 전혀 관심이 없다. 그리고 아무도 오지 않는다. 아이는 등이 시려오고 팔이 저려오고 뒤통수가 배긴다. 아이는 참다 못해 말한다. 나, 아파요. 그러나 아낙들은 어제 다녀온 어느 집 잔칫상에 오른 문어 눈깔을 누가 떼어먹었나에 관한 이야기에 열중해서 아이의 말을 듣지 못한다. 아이는 다시 조금 더 큰 소리로 나, 아프다니까요 했는데 차가운 바닥에 오랫동안 누워 있었던 탓에 입이 잘 움직여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아낙들이 아이의 말을 알아들을 리가 없다. 그래서 아이가 죽을 힘을 다해서 나 아파! 하고 소리를 친 다음에야 아낙들이 돌아본다. 얘가 뭐라는 거지. 글쎄, 아까부터 계속 누워 있더라구. 그러고는 다시 설거지와 수다에 열중한다. 아이는 더이상 소리지를 힘도 없어서 멍하니 누워 있다. 일을 다 끝낸 말수 적은 아낙이 천천히 아이에게 다가와 머리를 짚는다.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다시 손을 짚어보고는 애가 열이 있나, 하고 한 음절에 일 년씩 걸릴 정도로 천천히 발음한다. 떠들네는 물 묻은 손으로 아이를 잔칫집 전 뒤집듯 훌떡 뒤집어본다. 그 손이 닿는 곳마다 소름이 끼친다. 너 거기 계속 있을 거냐. 바닥이 좀 차가울 텐데. 계속 잘 거면 바닥에 얼굴 대지 마라. 입 돌아간다. 이윽고 두 아낙은 나란히 자배기를 머리에 이고 일어선다. 마침 똥지게를 진 일꾼이 우물가를 지나가지 않았더라면 아이는 수치심과 분노로 우물가에서 숨진 역사적인 인물이 되었을 것이다. 아이는 냄새나는 일꾼의 등에 업혀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고는 정말 사흘을 내리 정신이 오락가락할 정도로 앓았다. 앓으면서 아이는 세상의 어른들이란 어른들은 남녀·직업·귀천·말수를 불문하고 몽땅 아이들을 영원히 아이로 잡아두기로 공모하고 있다는 것을 뼈아프게 실감했다. 아이는 다시는 어른들에게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겠다, 어른들이 모는 자전거 뒷자리에 앉지 않겠다, 어른들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겠다, 그들끼리의 웃기는 합의와 일체감의 제물이 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동시에 이후에 학교에 가지 않을 핑계를 만들 때 우물가의 찬 바닥을 쓰지 않겠다, 조금 더 따뜻한 헛간이나 눈에 잘 보이는 동서나무 위를 이용하겠다고 마음먹었다. 또한 아이는 서른 살이 되기 전까지는 아이로 남아 있기로 결정했다. 그 결정은 교복이 입혀지고 어떤 섭리로 수염이 나기 시작하고 대학에 밀려들어가고 직장생활을 하게 되면서도 바뀌지 않았다. 다만 아이는 겉모습이 변한 만큼 그에 걸맞게 행동하는 자아를 그때그때 계발해내야 했는데 그중 성공적인 것은 중학교 때 쌍둥이로 변한 것, 그중 극적인 것은 고등학교 때 세 그룹의 맹원 내지는 지도자가 된 것, 그중 지속적인 것은 대학 시절 이후 집 바깥에서 자는 것을 일상화한 것 등이다. 먼저 성공적인 것을 설명하자면 아이가 중학교 2학년 때, 아이가 만 열네 살에서 세 달이 모자라던 어느 날, 서울의 변두리이자 구로공단의 배후지인 가리봉동으로 옮겨지고 전학 수속을 하러 가게 되면서부터의 주변 정황을 말해야 한다. 아이는 아버지의 뒤를 따라 앞으로 다니게 될 중학교로 전학 절차를 밟으러 가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아버지는 아이와 키가 비슷해졌는데 아이는 아버지의 어깨와 머리 너머로 갖가지 색깔의 연기를 뿜어내고 있는 수십 개의 굴뚝에 얼이 빠진다. 비포장 도로에는 하늘의 연기보다 자욱한 먼지가 피어올랐고 군데군데 수채가 흐르는 도랑이 있어 아이는 몇 번이나 새 운동화를 적신다. 비닐과 시멘트 조각, 쇳조각, 고무 조각처럼 갖가지 조각이 곳곳에 버려져 있고 죽어가는 나무들 사이에서 아이 또래의 아이들이 시커먼 공을 사이에 두고 표준말로 갖가지 욕설을 퍼부어가며 놀고 있다. 아이는 굴뚝보다도, 오가는 차보다도, 먼지나 쓰레기, 수채보다 그 사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오가는 사람들의 숫자에 질린다. 아침마다 골목에서 분대급의 사람들이 걸어나와 조금 더 넓은 길에서 합류하여 중대급이 되고 큰길에서 대대급, 사단급이 되어 같은 옷을 입고 같은 표정으로 같은 방향의 길을 걸어간다. 사람들은 자신의 머리카락 숫자만큼이나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말없이 부딪치고 밟고 처지고 뛰어넘고 쓰러져가고 있다. 아이는 한 반 정원 60명인 반에서 70번이라는 숫자를 부여받았다. 학기가 시작된 지 한 달도 채 안 되어 벌써 십여 명이 전학을 온 셈이었는데, 만일 학교가 무제한적으로 전학생을 받아들인다면 학기말에 가서는 전학생들만 가지고 따로 한 학년을 만들 수 있었다. 아이는 이 거대한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나날이 증식하고 뻗어 마침내 시작된 곳으로 돌아와 연결되는 폐곡선 속에서 미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스스로를 분열시키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아이는 스스로를 쌍둥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 쌍둥이는 생김새는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똑같지만 성격이며 성적이며 사고방식은 정반대인 것이 좋았다. 예컨대 아이는 집 앞에서 만난 같은 반 아이를 모른 척하고는 다음날 그걸 따지고 드는 반 아이에게 그런 적이 없다고 말함으로써 우연하고도 가볍게 스스로를 쌍둥이로 만들었다. 그 다음에 아이는 목욕탕 엿보기, 가게에서 물건 훔치기, 연필 깎는 칼로 갓 전학 온 촌놈의 깨끗한 새 교복 찢기, 버스표 뜯어내기 같은 갖가지 사소한 악행을 일삼는 아이들 그룹에 쌍둥이 하나를 보냈고 다른 쌍둥이는 착실하고 양순한 얼굴로 공부에 열중하도록 만들었다. 아이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이른바 연합고사와 공동학군이라는 당시의 고등학교 입시제도에 따라 시내에 있는 고등학교로 가게 된 것은, 쌍둥이로 분열된 자아의 통합, 분열하지 않을 수 없었던 지옥 같은 환경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고등학교에서 아이는 오히려 하나를 둘로 쪼갠 중학교 때가 좋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이는 고등학교 때 자의반 타의반으로 스스로를 각각 따로 생각하고 놀고 다른 가치를 존중하는 세 존재로 분열시키게 된다. 그중 하나는 중학교 때의 쌍둥이 가운데 하나의 유전자를 물려받아 포크라는 자그마한 흉기 겸 식기를 들고 다니며 사소한 일탈을 일삼는 그룹에 가담했다. 이 그룹은 이른바 ‘논다’고 하는 고등학교 학생부의 단골 문제학생에 비해서는 문제성이 덜하지만 악의성에서는 결코 뒤지지 않았다. 또 아이는 자신 가운데 하나를 가톨릭 학생모임에 내보내 한동안 생각하기를 거부했던 신과 인간, 봉사와 근행, 합법적인 이성교제 같은 고급스럽고 거창한 문제에 관해 진지하게 토론하게 했다. 마지막으로 아이는 첫번째 본 시험에서 성적이 조금 괜찮았다는 이유로 국어 선생에 의해 강제로 문예반에 들게 되는데 거기서 이상한 아이들을 만나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이상한 대화를 나누고 이상한 언어를 가지고 억지로 놀게 된다. 아이가 초등학교 때 이따금 백일장에 나가서 상이라는 걸 주워왔다거나 아이가 어릴 적부터 성인 대상의 서적을 유난히 탐독해와서 또래 아이들에 비해 풍부한 관용구를 구사한다거나 하는 것을 감안하면 문예반에 못 들어갈 것도 없는 일이지만 아이는 일상적으로 쓰는 욕이며 시험 답안지를 메꿀 때 쓰는 글이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과장스럽게 대상화될 수 있다는 것을 몰랐으므로 자발적으로 문예반에 든다는 것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 외에 아이는 평범한 고등학생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것도 잊지 않았기 때문에 아이가 세 그룹의 모임에서 그 모임의 구성원들이 정예, 핵심, 열성당원으로 지목하는 세 쌍둥이들을 보살피면서 생활한 일 년 동안 아이는 정신없이 바빴다. 그래서 아이는 한 해가 가기 전에 그 그룹 가운데 한두 개를 그만두어야겠다고 생각하고 각 모임에서 그런 의사를 밝혔다. 그러자 각 모임에서는 미리 짜기라도 한 것처럼 공통적으로 아이에게 구성원의 숫자에 십을 곱한 숫자만큼 ‘빳따’를 맞고 나가든지 그냥 찌그러져 있든지 하라고 충고했다. 아이가 탈퇴하면 자신들은 자폭하겠다고 위협한 그룹도 있었고 아이가 저지른 비행을 폭로하겠다고 한 부두목도 있었고 그냥 찔찔 울기만 하던 아이도 있었다. 아이는 두 해에 걸쳐 세 그룹 모두에게서 한 대도 맞지 않고 그만둘 수 있었는데 그러자니 수업시간을 온통 ‘빳따질’로 때우는 국어 선생의 영향력을 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대가로 아이는 그 국어 선생과 그후의 이 년을 한 반에서 생활하는 고역을 감내해야 했다. 대학에 들어가면서 아이는 이제는 모든 분열로부터 해방이다, 내 식대로 살겠다고 결심했다. 아이는 스스로를 쪼개기보다는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을 분류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줄을 서기보다 남이 줄을 서게 만들겠다는 기특한 생각을 하게 된 것도 그 무렵인데 교련시간말고는 줄을 설 일이 별로 없다는 게 유감이었다. 아이는 스스로 분류해놓은 각각의 세상 끝을 자신의 발로 디뎌보려고 했다. 시간을 아끼기 위해 아이는 사물과 사람을 알고 관찰하기보다는 홀리고 반하고 빠졌으며 도달한 곳에서 필요한 만큼 머물고 다시 다른 곳으로 떠나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러자니 그곳에서 자야 했다. 아이가 대학 들어가서 첫번째 맞는 해에 집에서 잔 날은 이백 일 정도일 것이다. 두번째 해부터는 과반을 넘었다. 네번째 해에는 입대를 했으니 대학에 들어가던 79년부터 졸업하던 86년에 이르기까지 아이가 집에서 잔 날은 반수가 될까 말까다. 아이는 틈만 나면 집을 나섰다. 그중 대표적인 것은 아이의 설명 없는 가출에 진절머리가 난 나머지 만천하의 이유 있는 가출에 대해서도 이를 갈게 된 부모로부터 단 한푼의 여비도 얻을 수 없게 된 아이가 쌀 두 되가 든 배낭을 메고 무작정 남쪽으로 걷기 시작한 때일 것이다. 걸어서 수원역에 도착한 아이는 공짜로 기차를 타려고 역 주변을 어슬렁거리다가 허기가 져서 철로변에 주저앉았다. 생쌀이라도 씹을까 싶어 쌀을 꺼내던 아이는 어둑어둑해지는 철로변의 다리 밑에서 불길이 솟는 것을 발견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그 불은 일대의 부랑인들이 빌어온 밥이며 반찬을 커다란 양은솥에 넣고 삶기 위해 피운 불이었다. 아이는 처음에는 머뭇거렸지만 두 끼를 굶으면서 걸어오느라 허기가 질 대로 진 위장이 시키는 대로 주춤주춤 말없는 부랑인 사이로 다가갔다. 아이는 그들에게 자신이 거지이면서 한때는 그들처럼 거지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배낭에서 쌀을 꺼냈다. 그리고는 말없이 자신을 지켜보는 일행 중에서 가장 나이가 든 사내에게 쌀의 일부를 건넸다. 사내는 쌀을 받아 자신이 깔고 앉은 방석을 밀고 그 아래 우묵한 구멍 속에 있는 푸대 가운데 하나를 열어 쌀을 집어넣었고 손짓으로 아이에게 앉으라고 시늉했다. 양은솥 속에서 온갖 냄새와 색깔이 버무려진 밥이 다 되자 사내는 자신의 그릇을 아이에게 주며 먹으라고 손짓했고 아이는 그때 먹었던 그 저녁을 매년 기념해도 될 정도로 맛있는 한때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렇게 밥을 굶지 않는 방법까지 알게 되자 아이의 가출벽은 한층 더 심해졌다. 심해졌다는 것은 시기의 불가측성, 기간의 불가측성, 이유의 불가측성이 한층 강해졌다는 말이다. 결국 아이의 가출은 무목적적 합목적성이라는 가출의 원리에 근접하는 수준으로 발전했다. 아이의 가출 역사에 굵은 글자로 기록할 만한 가출은 대학 2학년에서 3학년 사이의 겨울, 두 달 넘게 빈 절에서 지낸 일일 것이다. 절 아래에는 돌을 캐는 산판이 있었고 절을 둘러싼 숲의 소나무들은 벌겋게 말라죽어가고 있었다. 아이는 그곳에서 기거하는 동안 세수를 하지 않았다. 아이가 절에서 내려오기 전 어느 날, 산판의 밥집에서 두 달 만에 거울을 보니 얼굴이 삼년대한의 논바닥처럼 갈라지고 있었다. 조각을 떼어내자 겨울 동안 피지와 때에 덮여 있던 피부가 소년처럼 부드럽고 붉은 빛깔로 드러났다. 아이는 떨어진 딱지를 들고 거울을 향해 주름을 지으며 웃었다. 아이의 분열벽은 그때 실로 절정에 도달했고 동시에 끝났다. 만족한 아이는 짐을 꾸렸고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얼음물에 머리를 감았다. 머리에 남은 물기는 곧 얼음으로 변해 잘랑거리기 시작했고 그후로도 겨울만 되면 아이의 귓전을 울려 아이를 충동질했다. 사실 아이는 바로 그 소리 때문에 밤늦도록 잠자리에서 뒤척이다가 새벽에 무작정 차에 올라탄 참이었다. 어디로 가는지도 정하지 않고 액셀러레이터를 밟아 표지판에는 한 번도 눈길을 주지 않은 채 국도로만 내려온 길이었다. 아이는 이제 가방을 멘 아이가 다리를 건너가는 것을 본다. 냇가 바닥이 보이지 않지만 아이는 그 냇가는 수초가 많다는 것을 안다. 그 냇가는 아이가 한때 멈추었던 산판에서 나온 돌로 양안에 사방공사를 했을지도 모른다. 돌 틈에는 땅벌이 살 것이고 아이가 아이로 보였을 시절의 아이와 닮은 아이들이 함부로 돌을 집어넣었다가 벌에 쫓겨 냇물 속으로 뛰어들어 얼굴만 내놓고 용서를 빌기도 할 것이다. 아이는 다시 담배를 피워문다. 서른 살이 되었을 때 아이는 직장에 다니고 있었다. 아이는 자신의 서른 살의 의미에 관해 직장에 있는 컴퓨터에 서너 매 분량의 메모를 했다. 그 컴퓨터는 플로피 디스크로 부팅해서 플로피 디스크로 프로그램을 실행하고 내용을 쓰는 ‘쭉 뻗쳐진 기술(EXTENDED TECHNOLOGY)’을 자랑하는 퍼스널 컴퓨터였다. 아이의 상사가 지나가다가 아이의 어깨에 손을 얹고 모니터에 나타나 있는 게 소설이냐고 물었다. 아이는 소설은 서른 살의 아이로서는 쓸 수 없는 종류의 글이다, 서른 살에 어울리는 건 사표라고 농담을 했는데 그 농담이 진담이 되어 그후로도 매 해 그 무렵이면 사표를 쓰곤 했다. 사표를 쓰고 제출하고 반려받고 함께 술을 마시러 다니면서 아이는 그 메모를 잊어버렸다. 어느 해인가 불쑥 아이의 사표가 수리되었다. 사표를 쓰고 그 뜻을 관철하는 것만 생각했지 그후의 일은 생각해보지 않았던 아이는 무작정 놀 수밖에 없었다. 육 개월쯤 지난 어느 날 아이는 회사에서 가지고 나온 5.25인치 플로피 디스켓을 가지고 놀기 시작했다. 회사의 업무와 관련된 파일을 하나씩 지워나가던 아이는 오 년 전의 날짜로 되어 있는 ‘MEMO.HWP’라는 파일을 발견했다. 아이가 큁·遁글 워드 프로그램을 가동하고 그 파일을 불러오자 ‘옛판 파일입니다. 읽을까요?’라는 메시지가 나왔다. 아이가 엔터를 누르자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에 불이 들어오고 한참 있다가 파일을 읽을 수 없다, 디스크 드라이브 오류라는 메시지가 나왔다. 아이는 그 파일을 하드 디스크 드라이브로 복사를 했고 다시 읽으려고 했고 그 파일의 쌍둥이인 확장자가 ‘BAK’인 파일을 찾으려고 시도했고 파일 되살리기 프로그램을 복사하다가 디스크 드라이브를 갈아끼우기도 하고 오 년 전에 자신의 어깨를 두드렸던 상사와 만나 통음하며 기억을 되살려보려고도 했고 큁·遁글 1.1버전을 다시 깔기도 하는 등등등 할 수 있는 한의 모든 일을 다 해봤지만 허사였다. 결국 아이가 그 파일을 되살리는 일을 포기하고 새로운 ‘MEMO. HWP’ 파일을 작성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육 개월 후의 일이다. 그 육 개월 동안 아이는 원래의 ‘MEMO. HWP’에 들어 있을 그 무엇의 대용물을 썼는데 그 원고는 ‘소설’이라는 상표를 붙이고 책으로 출간되었다. 그 뒤로 아이는 ‘소설 쓰는 인간’으로 분류되었고 아이는 그에 대한 복수 내지는 보답으로, 어디 보자, 소설 속에 제 쌍둥이 가운데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까지 출격시켰다. 아이는 이따금 그 메모가 자신의 인생을 바꿔놓았다고 원망한다. 사실 그 메모가 무슨 죄가 있으랴. 그 메모를 하게 된 나이가 문제인 것을. 나이가 무슨 문제인가. 그렇게 생각한 아이가 원인이다. 아이는 그 메모에 우주의 생성과 소멸의 키워드가 들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아이는 그 메모에 예술과 인생의 불가분성을 증명할 잠언이 들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자신과 주위의 몇몇 사람들의 인생의 진로를 밝혀주는 이정표가 있을 거라고 여긴다. 아이는 그 메모 속에 최소한 어처구니없는 말이라도 들어 있기를 바란다. 말이 없으면 어처구니라도. 아무것도 없다, 없었다 하더라도 괜찮다. 이제 아이에게 그 메모는 충분히 신비롭다. 아이가 다리를 다 건넜다. 그러고는 문득 돌아서서 아이를 바라본다. 마치 아이의 존재를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이, 고랫적부터 알아온 사이라도 되는 양 물끄러미 아이를 바라본다. 무례하면서도 몰두해 있으며 어릴 적에 헤어져 알똥말똥한 핏줄에게 보낼 법한 눈길이다. 아이가 아이를 본다. 아이가 아이에게 홀린다. 아이들이 웃기 시작한다. 홀리게 한 아이가 먼저 웃고 홀린 아이가 나중에 웃는다. 저 녀석이 왜 웃는 거지? 똑같이 생각하면서 웃는다. =================================================================================== 황금의 나날 그녀를 만나러 가겠네, 서른 살이 되면. 아름답고 상냥한 그녀를 보러 가겠네, 내 나이 서른이 되면. 황금빗으로 머리를 빗고 있는 그녀에게 앵두를 들고 가겠네. 사나운 곱추가 지키는 탑에 갇힌 나의 천사를 보러 가야겠네. 대낮처럼 횃불 밝혀놓은 뜰을 숨어들어가 기름칠한 벽을 타고 올라 나 어린 밤뻐꾸기처럼 그녀를 찾으려네. 사랑을 잃어버린 여인들은 나를 비웃을 것이네. '얘, 너는 아직 어려. 사랑이 뭔지나 아니? 애가 어디서 나오는 줄 모르니?' 사랑을 찾지 못해 개떼처럼 술집을 순례하는 사내들도 깔깔거릴 것이네. '사랑이라고? 그런 말이 어떻게 사내 입에서 나오느냐?' 나는 대답하지 않네. 아무말 하지 않는다네. 그들이 그렇게 떠들다 늙어 죽을 것이기에. 그러나 내 사랑 그녀는 늙지 않네. 그녀는 수백 개의 시계 속에서도 늙지 않았네. 나 어릴 때 그녀는 읍내 한가운데에 있는 시계방에 갇혀 온종일 앉아 있었네. 하루 백쉰여섯 번을 우는 뻐꾸기 시계 밑에 앉아서 수를 뜨고 있었네. 이따금 흘러내려오는 머리칼을 걷어올리면서 유리문 앞을 지나가는 사람과 햇빛과 그늘이 만드는 연극을 보곤 했네. 왜 하루종일 거기에 앉아 있었느냐 하면, 그 많은 시계에게 밥을 주는 게 그녀의 일. 시계는 사람처럼 밥을 먹는 건 아니었네. 태엽을 감아주어야 방앗간 노새처럼 불알을 흔들거리며 세월의 수레바퀴를 돌렸네. 때가 되면 배부른 시계들은 한꺼번에 소리를 냈네. 딩동딩동 울고 때앵때앵 소리치고 덩덩 점잖게 말 걸고 땡 저꺽 땡 저꺽 절름거리기도 했네. 그 중에서도 그녀는 뻐꾸기 시계 밑에 앉았네. 때가 되면 작은 뻐꾸기가 작은 집에서 나와서 작은 목소리로 뻐꾹뻐꾹 울곤 했다네. 그녀는 그녀의 시계 밑에 앉았네. 시계방 뒤 컴컴한 골방에는 곱추가 외눈 안경을 끼고 시계를 고치고 있었네. 검고 기다란 얼굴에 달린 커다란 눈, 길고 가는 손가락으로 세상에서 가장 딱딱하고 작은 부속들을 만지작거렸네. 그는 세월을 다루는 사내였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무서워 했네. 그가 태어나면서 곱추였는지는 모르네. 그는 부자 아버지 밑에서 부자로 자랐네. 그녀를 아내로 데려왔기 때문에 아버지보다도 부자가 되었네. 아름답고 상냥한 그녀, 슬픔과 애절함으로 가득찬 그녀를 데려왔기에 세상 누구보다도 부자로 살았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 했네. 나의 아버지는 태어나면서부터 가난뱅이였네. 내가 아주 어릴 적 일이라네. 어느날 아버지는 황금을 캐러 먼 길을 떠났네. 떠나면서 어머니와 나를 버렸네. 어쩌면 자신을 버리기 위해 떠났는지도 몰랐네. 사람들은 그가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했네. 어떤 황금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하고 어딘가에 있는 황금은 처자와 고향 을 잊게 하는 독약이라고 했네. 어머니는 나를 업고 눈길 위를 헤매다가 어느 성당 앞에 쓰러졌다네. 그래서 나는 어머니와 함께 그 성당 사택에 살게 되었네. 성당에는 읍내에서 제일 아름답고 높은 탑이 있었네. 희고 네모진 탑 속에는 성탄목(聖誕木)에 다는 종처럼 생긴, 그보다는 훨씬 큰 종이 스무 개쯤 달려 있었네. 아침 점심 저녁 하루 세 번 종을 울리던 늙은 신부(神父)는 눈이 새파랬고 살이 희었네. 어머니는 그를 위해 밥을 짓고 청소를 하고 틈이 나면 아버지가 떠난 쪽으로 눈을 돌리다가 엉금엉금 바닥을 기어 다니는 내게 말을 하곤 했네. '너만 없어도 진작 팔자를 고칠 것인데.' 그리고는 넓고 넓은 성당 바닥을 닦는 먼지투성이의 걸레들을 힘껏 집어던지곤 했네. 그것을 집어다 원래 있던 자리에 가져다 놓는 일이 나의 일이 되었네. 내가 그 일을 잘하게 되자 어머니는 걸레를 허공에 던지는 대신 바로 내 얼굴에 집어던지기 시작했다네. 그 동안에도 곱추의 시계방에서는 시간이 흘렀다네. 내가 다섯 살이었을 때의 어느 여름밤을 기억하네. 내가 기억하는 다섯 살은 그것뿐이네. 슬픈 일은 기억하기 싫다네. 남은 것은 그 여름밤뿐이네. 은하수가 소리치며 흐르던 그 여름밤. 마당에서 모깃불 연기가 피어나고 깊이 모르는 웅덩이에서 악마구리 울음이 들리던 그 밤. 예배가 끝나고 여인들이 사택에 모였네. 사내들은 신부 모르게 술 마시러 몰려가고 여인들만 남았네. 모기가 몰려올까 봐 불을 켜진 않았네. 허벅지를 딱딱 쳐가며 모기를 쫓다가 여인들은 돌아가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네. '옛날에 금잔디 동산에 메기 같이 앉아서 놀던곳...'도 부르고 '꿈 속에 그려라 그리운 고향 옛터전 그대로 향기도 높다...'도 부르고 '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 한 채 고기 잡는 아버지와 철모르는 딸 있네...'도 불렀네. 정말 그런 노래였는지는 모르네. 내가 나중에 알게 된 슬픈 노래는 모두 그날밤 들었던 것 같네. 아니면 그 노래를 그 때 들었기 때문에 나중에 그 노래들을 배우면서 슬픔과 그리움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네. ======================================================================================== 이른 봄 천지의 숱한 사냥꾼들의 밝은 눈과 붉은 손을 뿌리치며 살아온게 얼마인가. 사람의 달력으로 치면 일곱 해하고도 반이라 할 것이나 내 몸은 여덟 번의 겨울이 무사히 지나간 것으로 기억할 따름이다. 내게는 나이를가지고 더 늙었다느니 어리다느니 하며 정답게 다툴 친구가 없다. 내 친구들 가운데 가장 운 좋은 녀석도겨우 다섯 번의 겨울을 넘기고는 죽어넘어진 그 자리에서 참기름이 발려 훌훌 날아 저 세상으로 갔다. 그것도사람들 말로는 자연에서의 평균수명은 다한 것이라니 운이 좋다고 할 수밖에.나는 아버지의 얼굴을 모른다. 알 게 뭐냐. 아버지는 서너 번의 겨울을 지내고는 들에서 객사를 했다고 한다.그놈의 다이메크론때문에. 아버지는 내가 알에서 깨어나기도 전에 가 버렸지만 젊을때의 내 생김새로 미루어아버지의 모습은 짐작할 수 있다. 몸무게는 대개 일 킬로그램 안팎, 황금과 구리, 자주색이 섞인 광택나는구릿빛 긴 꽁지, 흥분하면 부풀어오르면서 한층 붉은빛을 띠는 볏, 그 아래 목을 두른 흰 띠, 늘 한 발을 들고사방을 살피면서 세상과 삶의 균형을 유지하려는 모습. 말하다보니 이만하면 아버지와 나는 어느 조류, 어떤동물과 비교해도 나무랄 데 없이 잘생겼다는 생각이 든다,친구, 식구, 자아도취 같은 건 사는 게 뭔가 하는 존재론적 허무를 잊게 해주는 힘이 있다. 맛있는 먹이,훌륭한 사욕 닭,꿩,오리 따위가 몸에 기생하는 이나벼룩을 떨기 위해 모래를 파고들어가 비비대는 짓-교미의순간적 황홀 역시 그렇다.그러나 짧은 도취는 곧 사냥꾼을 인도해 오는 사냥개처럼 더 큰 허무를 불러오기십상이라는 게 내 오랜 경험에서 나온 결론이다.그래서 나는 오랫동안 혼자였다. 친구도 식구도 자아도취도 없이 혼자인 것이 편했다.잠깐, 내가 사는 곳을 좀 소개할까. 우리 친구들은 농촌의 구릉이나 산지, 들, 숲 모두에 고루 살고 있는데내가 사는 곳은 그 중에서도 유독 한갓지고 헐벗은 야산의 숲이다. 인가에서 멀리 떨어져 조그만 메밀밭을품고 있는 계곡이 있는 이 산은 만년을 보내기엔 아주 그만이다. 나 정도 나이가 들면 말이지, 제 입에 맞는맛있는 것만 골라먹고 제 몸에 맞고 따스한 둥지에 틀어앉아 명상에 빠지기에도 바쁘고 고단한 것이다, 나는지난 세월 대부분 그러했듯이 올해도 이곳에서 이번 겨울을 났다.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살았는가 죽었는가며느리발톱부터 조금씩 꼼지락거렸다.우리 꿩들의 나이를 알아보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사람의 발꿈치쯤에 해당할 자리에 붙어있는 며느리발톱이 얼마나 검고 날카로우며 단단한가를 보는 게 가장 빠르다.내 것보다 더 단단하고 더날카롭고 검은 며느리발톱은 극히 드물 것이며, 따라서 사람으로 치면 나는 거의 일이백 살은 산 셈이다.느직하게 인색한 볕을 내려보내는 겨울해가 뜬 다음, 지난 일이백 년 동안 그랬듯이 바람 자고 햇볕 바르기를기다렸다가 나는 메밀밭으로 천천히 걸어나왔다.그런데 어디서 왔는지 까투리 한 마리가 엉덩이를 흔들면서 넉넉지 않은 내 먹이를 훔쳐먹고 있었다. 내가 온줄도 모르고 처먹는 데만 열중해 있었는데 지나가는 살쾡이, 놀러 나온 고양이도 아무 상관이 없다는 그뻔뻔스러운 무방비상태에 나는 질려버렸다. 하긴 요즘 아이들은 다 이 모양이다. 항상 저를 지켜주고사랑해주고 보호해줄 누군가가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러다 죽게되면?(그냥 죽죠 뭐. 운명인걸요.) 그게대답이겠지. ================================================================================= 해방 술 마시는 인간 왜 우는 거요. 여자는 대답하지 않는다. 오히려 거추장스럽다는 듯이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을 떼어버린다. 눈물이 흥건히 여자의 붉은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보란 듯 눈물을 흘리는 건 무방비를 넘어 무례하게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눈물은 남이야 뭐라 하든 내 갈 길을 가겠다는 듯 단호하고 풍성하게 흘러내리고 있다. 그는 알쏭달쏭한 기분으로 찻술을 한 모금 더 마신다. 찻술은 차를 좋아하는 찻집 주인이 돈을 아끼지 않고 담갔다고 한다. 파는 술은 아니다. 일급의 차에다 소주를 부어 육개월 이상 그 성분을 우려낸 것이 찻술이다. 잔에 따르면 차처럼 푸른 빛깔이 돌고 무미에 가깝게 청결하다. 왜 우는 걸까. 그는 혼잣말을 해본다. 그러나 여자는 우는 이유를 쉽게 말해줄 것 같지 않다. 바깥은 봄빛이 화사한 대낮인데 이층에 자리한 찻집은 두꺼운 커튼이 내려져 있어 굵은 촛불 두 대를 밝혀도 상 밑은 컴컴하다. 그는 하릴없이 벽에 기대어 있는 가야금에 눈을 돌린다. 그 가야금은 골동 취미가 있는 주인이 가져다둔 장식품에 불과했지만 우연히 들렀던 그의 손때가 묻으면서 소리의 길이 났다. 그는 술을 끊으면서 허전함을 메우기 위해 배우기 시작한 어설픈 솜씨로 가야금을 연주했다. 그는 자신이 내는 소리가 형편없다고 여기지만 주인은 그를 현존하는 최고의 가야금 연주자로 생각한다. 그래서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찻술을 그에게 준 것이다. 그가 알기로 찻집 주인은 가게와 가야금과 차에 미쳐 그외의 것은 돌볼 생각은 하지 않는다. 같은 여자이긴 하지만 그에게 그 여자가 우는 이유를 설명해줄 수 있을 성싶지 않다. 왜 울지. 그는 이번에는 가까이에 앉은 사람들을 차례차례 둘러보며 물어본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다. 지역신문사의 문화담당 기자인 김, 김의 선배로 연극을 한다는, 연극에서도 연출인지 배우인지 분장인지 조명인지 소품담당인지 아니면 그가 모르는 다른 일을 하는지 얼굴만으로는 알 수 없고 물어보지도 않은 사내, 그 사내의 후배로 서울에서 함께 왔다는, 이십대처럼 어려 보이는 얼굴이지만 사십대처럼 흰머리가 듬성듬성해서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사내, 그리고 그 옆에 문제의 우는 여자가 앉아 있다. 그들은 침묵의 동맹이라도 맺은 듯 말이 없다. 그가 알기로 그들은 눈물과 침묵으로 한 패거리가 될 만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 가운데 어느 호사가가 가야금을 보고 연주를 듣고 싶다고 했다. 그들 가운데 또 누가 오디오를 통해 들려오는 가야금 소리말고 진짜 소리를 듣고 싶다고 했다. 찻집 주인은 세상에 단 하나뿐인 이 가야금을 연주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단 한 사람뿐인데, 일년에 몇번 올까말까한 사람이라 운이 좋아야 만날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마침 그가 찻집 문을 밀고 들어선 것이다. 주인은 그에게 가야금 연주를 부탁했다. 그는 그전에 이 집에 술이 없는 줄은 알지만 오늘은 차 대신 술을 마시고 싶다고 했다. 주인은 뒷방에 있는 묵은 찻술이 빛을 보는 날은 일년에 한두 번이다, 오늘은 여러 가지로 희한한 일이 많다고 수선을 떤 다음 찻술을 가져왔다. 그때부터 그는 찻술을 마셨고 다른 사람들은 녹차를 마시면서 그의 연주를 기다렸다. 그러면서 30분쯤 흘렀다. 그런데 여자가 울기 시작한 것이다. 왜 운 거요. 그는 이번에는 과거형으로 물어본다. 여자는 더이상 울지는 않지만, 눈물자국이 남은 얼굴을 든다. 눈물자국에 마스카라 가루가 묻어 있다. 여자는 닦을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것이 여자를 속없는 사람, 넋 나간 사람으로 보이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눈물을 흘렸다는 건, 땀도 콧물도 침도 아닌 눈물을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흘렸다는 건 보통 일은 아니다. 여자는 배부른 초식동물처럼 완전히 방심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 그는 생각해본다. 그 여자는 화가이고 작품을 순회전시중이라 했다. 기자인 김이 길에서 우연히 만나 동행해 왔다. 그는 예술이라면 다 좋다, 그림을 그리든, 연극을 하든, 소설을 쓰든 해볼 만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 말이 여자를 울게 만들었을 리는 없다. 그 역시 한때는 기자였기 때문에 김은 그를 선배라고 불렀다. 그는 기자말고도 개인회사의 월급쟁이나 교사처럼 남 보기에 비교적 반듯한 직업에 종사한 적이 있었다. 개인회사에 다닐 때 여직원이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의 1남8녀의 장녀라는 걸 알고는 월급 외에, 회사 전체가 협잡과 비리를 저지르는 것을 방조한 대가로 자신에게 돌아오는 돈의 일부를 일년 가까이 나눠준 적이 있다. 그 여직원은 어느날 술에 취해 집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하며 그에게 자신을 여관으로 데려가달라고 했다. 여관으로 데려가자 울면서 옷을 벗었다. 그때 그는 몹시 화를 내며 옷을 다시 입으라고 야단을 쳤다. 그 길로 여관 문을 나섰다가 통행금지 위반으로 파출소 신세를 졌다. 사장이 빠블로프의 개처럼 침을 흘릴 정도로 예뻤던 그 여직원은 다음날 일곱 여동생을 데려와 차례로 그에게 인사를 하게 했다. 은인이라고, 평생 잊으면 안된다고. 그때 그 여동생 가운데 하나인지도 모른다. 은인을 만나서 반갑다고 울었나. 그랬다면 만나자마자 울었어야지, 처음 뵙는다는 인사를 하고 삼십분쯤 지나서 울기 시작한 건 이해가 되지 않는다. 교사 시절에 가르친 학생인가. 그가 교사 생활을 그만둔 뒤 십년 넘게 스승의 날과 생일에 꽃을 보낸 제자들이 있기는 했다. 그렇지만 그런 제자라면 그도 얼굴을 다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모르는 제자라고 해도, 몰라준다고 해서 울 것까지는 없지 않은가. 여인의 나이는 적게 잡아 삼십대 초반, 많이 잡으면 삼십대 후반이다. 그러니 그와는 열두어살에서 대여섯살까지 차이가 날 것 같다. 결혼을 했는지 안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림을 그린다고 했으니, 그게 동양화인지 서양화인지 모르지만, 결혼은 했을 수도 있고 안했을 수도 있지만 아무튼 그건 우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 사내 넷이 눈을 부릅뜨고 앉아 있는 찻집에서 눈물을 거의 전시하듯 흘리려면 필시 그에 상응하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 간밤에 술을 진탕 퍼마신 김과 그의 후배인지 선배인지 친구인지 하는 삼총사가 아직 술이 덜 깼다고, 그가 건네는 술잔을 한 줄에 앉은 참새처럼 사양하면서 술 얘기가 나왔다. 그들은 전날 낮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해서 새벽에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갈 데까지 갔다, 땡전 하나 남기지 않고 몽땅 마셔버렸다, 한마디로 미쳐버렸다고 장황하게 늘어놓으면서 서로를 칭찬했다. 이야기를 듣던 그는 차 마시는 사람은 차에 관해 이야기하면 된다, 술을 마시는 사람만이 술에 관해 말할 자격이 있다고 말했다. 또 갈 데까지 가본 사람만이 우주의 끝이 어떻게 생겼는지 말할 수 있고 미치도록 마셔본 사람만이 미친놈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농담이었는데도 아무도 웃지 않았다. 그래서 분위기가 조금 썰렁해졌다. 그래서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화끈하게 울었던가. 그럴 리는 없다. 그는 다시 생각한다. 그는 자신이 최초로 목격한 갈 데까지 간 사람 이야기를 꺼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자취방을 정리해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길거리에 한 사람이 모로 쓰러져 있었다. 그의 곁에는 빈 소주병이 구르고 있었는데 거지꼴이긴 했지만 양복 차림에 안경을 끼고 있었다. 탁탁 털어 일으켜세우고 잘 씻기기만 하면 멀쩡한 삼십대 사내가 될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사람이 쓸 만한 인간인지는 고사하고 죽었는지 살았는지 신경 쓰는 사람조차 없었다. 중고등학교를 합쳐 도청소재지에서 4년이나 자취생활을 했지만 여전히 촌티가 남아 있던 그가 그 사람을 흔들자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 사람은 때가 반질거리는 손바닥을 내밀면서 가진 돈을 톡톡 털어 술을 마시고 잠이 들었는데, 그 달디단 잠을 깨워놓았으니 다시 취하도록 마실 돈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고는 남은 손으로는 그의 교복 소매를 단단하게 움켜쥐었다. 그는 교복 단추 두 개와 고향집으로 돌아갈 차비의 삼분의 이를 뜯기고 그의 집요하고 더러운 손에서 놓여날 수 있었다. 며칠 후 동네 어귀에서 그는 자신의 아버지와 나이가 비슷한 사람이 동네에서 가장 오래 묵은 느티나무 밑에 오그리고 누워 있는 것을 보았다. 그의 곁에는 새 모이 같은 라면 부스러기가 흩어져 있었고 술이 삼분의 일쯤 남은 소주병이 세워져 있었다. 자고 있는 얼굴은 군데군데 얼어터졌고 더러웠지만 표정만은 평화로워 보였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고 불현듯 그 경지를─그것이 평화의 경지인지, 무위의 경지인지, 술의 경지인지, 경지의 경지인지는 모르지만─부러워하게 되었다. 그는 한참 동안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잠든 사람과 잠든 사람을 둘러싼 고요, 그의 얼굴을 비추는 초겨울 햇빛에 홀려 있었다. 그 나무에서 이십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동네의 주막 겸 구판장이 있었다. 그 안에 모여 있던 사람들 중에서 누군가가, 그의 아버지였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말했다. 술 처먹으면서 생라면이라도 씹어 먹으면 아직 완벽한 술꾼이라고 할 수가 없는 기여. 우리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에 삼년 동안 곡기 하나 대지 않고 술만 마셨다고. 그래도 한번도 저 모양으로 쓰러져서 운신도 못할 정도가 된 적이 없었다니께. 그 이야기를 하자 그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요즘 서울의 지하철에도 부랑인이 부쩍 늘었다, 먹고살기 위해 나온 사람들을 아무도 말릴 수 없다, 이러다가 다시 육십년대로 돌아가는 게 아니냐고 말했다. 여자가 육십년대로 돌아가는 게 겁이 나서 우나. 보릿고개가 생각나서 우나. 그는 다시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술로 망하는 놈은 꼭 술 아니라도 다른 걸로 망하게 되어 있어. 노름 중독이 된 사람을 억지로 노름판에서 떼어놓으면 술이나 약물 중독으로 가기 쉬워. 중독이란 게 원래 그래. 어떤 것에 중독이 되는 사람은 다른 중독에도 약한 법이야. 내가 알코올 중독자가 된 것도 따지고 보면 다 내림이지.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소문난 술꾼이었어. 옛날 말로 하면 주정뱅이고 요새 말로 하면 알코올 중독자야. 할아버지는 소싯적부터 익힌 한학으로 인근 사람들에게서 존경을 받았지. 아버지는 악착같이 돈을 모아서 한재산 마련하는 바람에 또 존경을 받았고 말야. 아버지는 망하고 또 망했는데도 돌아가신 다음에 보니 내 앞으로 논을 백 마지기 넘게 남겨주셨어. 할아버지한테선 손바닥만한 땅도 물려받지 않으셨는데. 할아버지는 철들고 나서 한 끼도 술을 거르지 않으셨지. 아버지는 하루도 술을 거르는 일이 없었고. 어릴 때부터 두 양반 술 심부름을 내가 했지. 이상해. 할아버지 술 심부름을 하면 아무 일도 없는데 아버지 심부름을 하면 꼭 탈이 나. 동전 한 닢에도 발발 떠는 아버진데 오다가 술을 한 방울이라도 흘리면 그냥 놔두었겠나. 한번은 비오는데 술주전자를 들고 집으로 오다가 개한테 물렸어. 그러면서도 술은 안 쏟으려고 머리 위로 주전자를 치켜들다가 반쯤 쏟고 말았어. 개한테 물린 다리보다 술 쏟은 게 걱정이 돼서 대문 옆에서 들어가지도 못하고 있는데 삐끔 내다본 아버지가 댓바람에 술주전자를 빼앗더니 내 머리를 내려치는데, 아, 난 그때 정말 세상에 있는 술을 몽땅 없애버리고 싶었어. 마시다가 죽어도 좋으니. 그런 식이다 보니 나를 특별히 귀여워하시던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인간 취급도 하지 않았어. 그런 대립과 모순 속에서 내 인생관이 결정됐는지도 몰라. 그때까지만 해도 좌중은 그의 이야기에 그다지 집중하지는 않았다. 술로 밤을 지샌 사내들은 이따금 고개를 흔들어대며 헛구역질을 했고 그때마다 전날 마신 술에다 매콤한 안주 냄새가 섞여 나왔다. 그때까지는 여자도 울기는커녕 뽀송뽀송한 눈으로 당나귀처럼 고개를 저어대는 세 사내와 대낮부터 물 마시듯 술잔을 기울이는 폐품 같은 사십대 사내를 신기한 듯 쳐다보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돌아가시면서 아버지에게 내 공부는 내 능력이 닿는 대로 시키라고 유언을 하셨어. 아버지 말로는 그게 평생 당신이 할아버지에게 사람 취급을 받은 최초이자 최후의 순간이었다는 거지. 그 덕에 난 인색한 아버지 돈으로 대학까지 다녔어. 군대를 갔다 와서 복학을 하려는데 문제가 생겼어. 아버지는 술만 마시면 할아버지 때문에 당신 인생이 이렇게 시장바닥으로 풀렸다고 아무 상관도 없는 어머니를 두들겨팼지. 나는 건드리지 않았어. 내가 당신의 아버지가 당신을 인간으로 보게 한 촉매 역할을 했으니까 그랬는지도 모르지. 아버지 사업이 시름시름 망해가는 게 보여. 그렇다고 내가 아버지를 도와줄 수 있나. 아버지가 죽이고 싶도록 미운데. 그래도 아버지가 완전히 망하는 데 십년 넘게 걸렸지. 망하기 오년 전쯤에 아버지가 앓아눕는 바람에, 술 때문에 그런 건 아니고 술 마시고 나오다가 술 나르는 트럭에 치여서 발등이 부러졌나 어쨌나 했는데 그게 잘못돼서 발을 잘라야 했거든. 그래서 망하는 데 시간이 더 걸렸지. 아버지가 그렇게 된 걸 보고 나는 안심하고 복학을 했지. 그때도 술은 입에도 안 댔어. 술이 할아버지, 아버지를 폐인으로 만들었고 어머니를 평생 종처럼 살게 만들었으니 원수가 따로 있겠어. 그런 이야기는 병원에서, 단주자(斷酒者) 모임에서 몇번은 거듭한 이야기라 정리가 잘돼 있었다. 그 때문인지 사람들은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도, 나중에 보니 상당한 미모인 그 여자는 울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졸업을 하니까 곧 아버지가 돌아가셨지. 아버지 장례식 치르면서 보니 평생 맞고만 산 어머니가 불쌍하기도 하고 잘된 것 같기도 하더라. 할아버지, 어머니 생각에 많이 울었지. 그런데 울 때마다 사람들이 술을 권하는 거야. 주는 대로 받아마셨어. 그런데 희한해. 문상객들에게 돌아가며 한 잔 이상씩은 받아 마셨는데도 하나도 안 취해. 그래서 내가 타고난 술꾼이라는 걸 알게 됐어. 그때부터 나도 술자리는 안 빠지고 다녔어. 월급쟁이 생활을 할 때는 일년 삼백육십오일 내내 술이었어. 그만두기 전에 딱 하루 쉬었는데 그 해가 윤년이었나 그래. 2월 29일. 금강에서 독점적으로 골재 채취를 하는 회사였는데 건축업자들한테 뇌물을 받아 모았다가 담당 공무원들에게 몰아주는 게 내 일이었지. 뇌물을 주는데 맨정신으로는 안되겠으니 술을 마시고 줄 놈이 친구로 보이기 시작하면 돈을 줘. 돈을 받는 것도 맨정신으로는 못하겠으니까 또 술을 마실 수밖에. 받기 전에 마셔, 주기 전에 마셔, 받고 나서 미안해서 마셔, 주고 나서 잊기 위해 마셔, 그냥 아무 이유도 없이 마셔, 풍차처럼 물레방아처럼 삼백육십오일을 쉬지 않고 돌아갔지. 그러던 중에 어찌어찌 신문사에 취직이 됐어. 죽은 할아버지 빽으로 들어간 거지. 기자가 거들었다.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이 선배가 신문사에 있을 때 얼마나 기똥차게 기사를 썼는지 전설이 남아 있더라구요. 시골에서 갓 쓴 노인들이 논설위원실에 와서 이 선배를 찾았답니다. 쓴 사람이 이십대 평기자라고 하니까 거짓말한다고 노발대발했다는 거죠.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때 벌써 반은 중독자였어. 술기운으로 쓴 거지. 면접할 때도 술을 마시고 들어가서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도 안 나. 편집국장이 할아버지한테 한문을 배운 적이 있어서 그 덕으로 취직이 된 거지. 꼬박 삼년 기자 생활을 했어. 한번은 기사를 보고 어떤 사람이 찾아왔어. 평생 그렇게 시원하고 통쾌한 기사는 처음 봤다는 거지. 아침 열시에 전화를 했더군. 열시 반에 마감을 하고 내려갔지. 그때부터 저녁까지 낮술을 마시고, 오차나 육차쯤 해서 밤에만 가는 술집에 찾아갔지. 그땐 나를 아는 술집에서는 술을 안 줄 때야. 문을 차고 소리를 지르고 물컵을 던지고 해도 누구 하나 신경도 안 써. 나도 아니까, 안다는 게 의식이 있어서 아는 게 아니라 버릇이 되어서 아는 거지, 소리만 지르다가 나오지. 그러고는 집까지 걸어가는 도중에 있는 모든 구멍가게에 들러서 한잔씩 마시는 거야. 집에 가면 새벽이지. 방안에는 술병이 열병하듯이 사방을 삥 둘러서 있었지. 안쪽으로 올수록 줄의 길이가 점점 줄어들지. 한 줄 더 쌓을 때까지 마시고 또 마셨어. 여인은 그때 그를 비난하는 듯이 눈이 약간 가늘어진 것 같기도 했다. 그는 다시 술잔을 비우고 입을 닦았다. 몇가지 나물 안주가 있었지만 그는 젓가락도 대지 않았다. 한동안은 소금을 먹고 입을 닦았는데 이제는 입을 닦는 습관 자체가 안주였다. 그렇게 하다가 날이 밝아서 같이 출근을 했지. 열시 반까지 기사를 쓰고 올 테니 어제 나를 기다리던 거기 가서 잠깐만 기다려라, 오늘은 제대로 한잔하자고 그랬지. 정확하게 열시 반에 내려갔는데 도망가고 없어. 그게 서운해서 마시고 그 사람이 그리워서 마시고. 이태백이가 환생을 해서 기자가 된다고 해도 그런 식으로 하면 계속 봐줄 사람은 없지. 기사를 쓰다가 의자에 앉은 채 졸도를 한 거야. 병원에서 깨어나니까 회사에서 그만 나오라더군. 내가 나오면서 정말 좋은 회사가 됐어. 나한테 교사자격증이 있다는 걸 누가 알려줘서 고향에서 좀 떨어진 조그만 소읍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했지. 그러고서 술을 한잔 시원하게 들이켰던가. 그는 기억하지 못한다. 술자리에서 몇 잔을 마셨는가를 기억 못하게 된 건 십년이 훨씬 넘었다. 왜 중독이 되도록 마시는 건가요. 죽을지도 모르는데. 인사할 때를 빼고 처음으로 여자가 입을 열었다. 여자는 그때까지 전혀 울 기색은 없었다. 술주전자가 빈 것을 안 주인이 다시 주전자를 채워 왔다. 그는 여자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다른 사내들도 차례로 그가 건네는 작은 술잔을 받았다. 김의 선배라는 수더분한 인상의 사내는 끝내 사양했다. 그는 주전자를 가볍게 기울여 자신의 찻잔에 술을 채웠다. 그러고 나서 그는 여자보다는 술깨나 마신다는 사내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나 같은 경우는 대물림이라 어쩔 수가 없지만 보통은 이렇게 얘기해.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술을 가까이하다 자기도 모르게 빠져드는 형이 있지. 또 사내답다는 말을 듣자고 술을 홀짝거리기 시작하다가, 아니면 술의 힘을 빌려 좌절감을 이겨보려다 중독자가 되기도 해. 어릴 때 계속 칭찬만 받고 자란 사람들이 중독자가 되는 경우가 많다는 말도 있어. 한두 가지가 겹치기도 할 거야. 술이란 제가 지겨워질 때까지는 중독자를 마음대로 죽게 하지도 않는 놈이야. 내 의지대로 죽는 것도 힘든 거요. 누가 어떤 외국영화 이야기를 하던데, 거기에 술로 자살하는 놈 이야기가 나온다더군. 「라스베이거스를 떠나며」, 그걸 겁니다. 술을 마시는 대신 찻잔을 만지작거리던 김의 선배가 입을 뗐다. 초면인데도 그들은 모두 그에게 존댓말을 했고 그는 대충 반말로 말하고 있었다. 그들이 조금씩 그가 따라주는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서, 술자리에서는 그에게 익숙한 권력관계가 형성되고 있었다. 마시는 자는 마시지 않는 자의 우위에 있었고 많이 마시는 자는 적게 마시는 자의 우위에 섰고 물처럼 들이붓는 자는 잔으로 제법 많이 마시는 자의 우위에 섰다. 그는 일방적으로 말하고 호기롭게 선포했다. 나는 그런 거 안 믿어. 완전히 소설이고 영화라구. 술의 종, 로봇, 아니 신도가 돼 있는데 어떻게 주인이신 신의 허락도 없이 주인을 이용해서 제 맘대로 죽어. 인간에게는 최소한의 존엄이라는 게 있다고 하지. 안락사처럼 자기 의지대로 죽을 수 있는 권리 같은 거. 중독은 그 최소한의 권리를 박탈하는 거야. 자기 맘대로 죽고 자기 권리로 살고 하면 그게 무슨 중독이냐구. 그 영화에 나오는 사람이 현실에도 있다면 말이야, 그 사람은 그냥 보통 주정뱅이를 뻥튀기해놓은 거라고 생각하면 돼. 그 정도라면 아직 멀었어. 아까 라면봉지를 옆에 두고 있는 사람 이야기를 했지. 그 수준밖에 안되는 거야. 진짜 중독자에게는 술이 술이고 안주이자 마약이고 인생의 극치이며 일상생활인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 것일세. 자네들은 이해 못해. 한 잔을 마시자마자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는 것을 보니 여자는 주정뱅이 수준도 못 되는 것 같았다. 그 수준에서 어찌 심원한 중독자의 세계를 이해할 것인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게 서운해서 울었나.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다시 생각한다. 또 무슨 이야기를 했던가. 술이 들어가면 간에서 무슨 탈수소효소라든가 하는 걸 만나 아세트알데히드라는 물질로 바뀌게 돼. 바로 그 성분이 속을 쓰리게 하고 토하게 하고 사람을 개같이 만드는 거지. 그런데 그 무슨 효소가 없는 사람도 있다는군. 한 잔만 마시면 얼굴이 빨개지는 사람들 말이야. 그 사람들 색깔 변하는 걸 보면 꼭 오징어 같아. 이 아가씨가 그런 케이스 같은데. 그렇다고 그 사람들이 술을 피해서 살 수 있을 것 같나. 아니지. 술을 못 마신다는 이유로 사회생활에서 스트레스를 받아서 중독자가 된 사람도 있어. 그런 사람들한테 물어봐. 왜 죽을지도 모르는데 술을 마시느냐. 술을 마시면 어차피 반쯤 죽는 거라구. 사는 게 죽는 것처럼 힘든 사람들, 죽지 못해 사는 사람들, 그래도 막상 죽을 수는 없는 사람들, 술로 반은 죽지만 반은 사는 거야. 여기 있는 아가씨는 예술을 한다니까 내 말을 이해할 거야. 예술, 그것도 반쯤 이승을 떠나는 거 아니오. 갔다가 돌아오고 갔다가 돌아오고 하다가 언젠가는 완전히 가는 거 아니냐 이 말이지. 아가씨가 아닌데 아가씨라고 불린 것 때문에, 그게 억울해서 울었나. 아니다. 예술을 제멋대로 해석하고 단순화시켜서 그게 못마땅하고 억울해서 울었나. 그것도 아니다. 그는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왜 울었나. 왜 울었나. 왜? 알코올 중독은 취해서 쓰러질 때까지 술을 마시고 정신이 들면 또다시 마셔야 직성이 풀리는 증세지. 중독자는 술에 대한 조절 능력을 상실한 사람, 술만 마시면 상습적으로 말썽을 일으키는 사람, 늘 술을 마셔야만 하는 사람이지. 여기에도 등급이 있고 격의 차이가 있어. 술 처먹어서 가정과 사회 생활에 심각한 지장을 초래하는 걸 알코올 남용이라 하고, 술을 끊었을 때 심리적으로나 신체적으로도 금단현상이 나타나서 다시 술을 마시게 되는 경우는 알코올 의존이라고 한다네. 그게 등급이지. 격의 차이? 그거야 술에 취했을 때 곱게 미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지. 술을 마시면 일차로 대뇌가 해방이 되지. 얼굴이 붉어지고 밥맛이 생기는 단계를 서서히 지나면 과묵한 사람은 말이 많아지고 소심한 사람은 큰소리를 치고 파멸에 이른 사람들은 절망을 잊어. 여기까지는 그럭저럭 봐줄 만해. 더 마시면 소뇌가 해방돼. 비틀거리고 혀가 꼬이지. 제가 흔들거리면서 똑바로 서 있는 남들보고 아쭈, 요게 피하네, 하는 사람들 봤겠지. 그 다음에도 더 마시면 중뇌의 해방을 맞게 돼. 체온이 떨어지고 혈압이 떨어진다네. 잠자기 십상이야. 그 다음에는 연수(延髓)의 해방. 해방은 좋은데 부작용으로 호흡곤란이 생기는가봐. 알코올 혈중농도가 0.5퍼센트 이상이 되면 절반은 죽는대. 그러면 영원한 해방을 맞겠지. 그 과정에서 아무나 잡고 시비를 걸고 아무데서나 오줌똥을 갈기고 깔아뭉갠 자리에 쓰러져 자고 집에 가서 마누라 패고 애들 때리고 가구 부수는 사람들이 있지. 그런 걸 저급이라 하네. 저 혼자 취하고 저 혼자 헛걸 보고 저 혼자 미치면서 저를 뿌리까지 파괴해서 폐인 취급을 당하는 건 다소간 품격이 있는 거고. 말씀중에 죄송합니다만, 어느 쪽이셨나요. 선배의 질문. 그는 천천히 대답했다. 물론 나는 품격있는 중독자지. 잠에서 깨면 내가 중독자라는 걸 들키는 게 싫었어. 아, 물론 잠에서 깨면 곧 마셔야지. 그게 중독자의 본분 아니냐구. 일단 세수를 하고 면도도 깨끗이 하지. 슈퍼 주인들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들이냐. 그 사람들, 동네에 알코올 중독자가 누군지 다 알고 있어. 그래서 슈퍼에 가면 엉뚱한 걸 잔뜩 사지. 화장지·라면·식용유·과일·야채·이쑤시개·건전지까지. 그리고 맨 아래에 살짝 사홉들이 소주 두 병을 끼워넣는 거야. 그러면 슈퍼 주인이 내가 중독자인 걸 모르는 척해주지. 난 한때 선생질도 했다구. 김선생님, 요즘 방학이죠. 날씨가 참 좋습니다. 뭐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면서 비닐봉지에 술병을 넣어주지. 보통 물건은 밖에서도 알아볼 수 있는 반투명의 봉지, 술병은 밖에서 안 보이는 검은 비닐봉지에 담아주지. 그걸 들고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병뚜껑부터 따요. 손이 떨려서 병따개로는 잘 안 따져. 이빨로 따다 보니까 이가 결딴났어. 한 병은 숨도 쉬지 않고 마셔. 다음 병은 병따개로 딸 수 있어. 술이 들어가면 손이 훨씬 덜 떨리거든. 두번째 병은 천천히 마시지. 그러고 나서 사온 물건을 정리하고 세탁기도 돌리고 빨래도 널고 문을 활짝 연 다음 청소를 하지. 이웃에게 정상인으로 보이고 싶어서 말이야. 그 다음에는 사가지고 온 재료로 요리를 하는데, 난 요리를 참 좋아했거든. 탁탁탁탁 도마 소리도 신나게 내고 지글지글 볶고 굽고 뒤집고 데치고 찌고 삶아. 아, 물론 내가 먹지는 않아. 안 먹는데 어떻게 사느냐. 알코올에도 열량이 있어. 실속이 없어서 살찌게 만들지는 않지만 열량은 열량이니 술이 밥이요, 안주라는 말도 맞아. 술을 마시는 동안에는 안 먹어도 어지간히 견디는 거야. 난 내가 해놓은 요리를 앞방의 자취생들한테 갖다주곤 했어. 학생들인데 그맘때면 먹어도 돌아서면 배고프잖아. 난 이틀 걸러 한번은 음식을 갖다줬어. 그애들이 나를 얼마나 고마워하고 존경했는지 모를 거야. 부모들이 일부러 인사하러 올 정도였지. 애들한테 잘해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구. 한번은 아침에 내장탕을 끓였어. 기다리고 있는데 애들이 안 와. 한밤중에 왔길래 냄비째 갖다줬지. 잘 먹더라구. 나도 흐뭇했지. 다음날 저녁때가 다 돼서 또 다른 음식을 해가지고 갔는데 문이 그냥 열려. 문 앞까지 애들이 기어나와 쓰러져 있더라구. 게거품을 흘리면서 오줌똥 다 싸고 그런 난리가 없었지. 그때가 여름이었어. 음식이 상했었나봐. 병원에 연락해서 실어가는데 정말 내 애가 죽는 것처럼 애가 타. 늙은 부모가 밤차를 타고 왔어. 나를 보더니 붙잡고 우시는데 나도 울고 말았지. 애들도 그때 깨어나서 울고. 얼싸안고 한참을 울었어. 그 사람들, 나를 생명의 은인으로 알고 있어. 지금도 그럴 거야. 노부모와 학생과 이웃집 아저씨가 얼싸안고 울었다는 말이 그 여자를 울게 만들었을까. 그 여자는─화가라 했던가, 사진작가라 했던가, 조각가였던가, 상관은 없지만─어쨌든 예술가가 아닌가. 예술가라면 감정을 다스리는 일에 이골이 났을 것이다. 하찮은 이야기에 쉽게 감동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지간해서 울게 만들 수는 없다. 그런데도 여자가 울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가. 혹시 여자가 감동을 하지 않을까 조바심을 낸 건 아니었을까. 그래서 그 이야기까지 해버린 걸까. 술만 마시면 우는 여자의 이야기. 그는 담배를 피워문다. 성냥을 흔들어 끄고 재떨이에 던지면서 생각을 해낸다. 재떨이. 교사 생활을 할 때 그는 어떤 여자를 만났다. 그 여자가 재떨이였다. 재떨이는, 그때는 재떨이가 아니고 술집에 있던 여자였다. 그보다 나이가 서너살은 위였다. 그는 소읍에 있는 유일한 고등학교의 교사였다. 그는 소읍에 있는 수많은 여자 가운데 그 여자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생전 처음으로 한 여자를 차지하고 싶었다. 그 핑계로 수많은 밤을 술로 지샌 끝에 그는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냈다. 그는 그 여자에게 결혼하자고 말했다. 그 다음에는 그 여자와 결혼을 할 것이라고 술집의 단골인 동료들에게 공표했다. 그러나 즉각 전세계적인 반대에 부딪쳤다. 그의 동료교사 가운데 그와 술을 함께 마시며 이야기를 나눈 사람 전원이 반대했다. 그 다음에 반대한 사람은 그의 집안 식구들이었다. 어머니와 누이동생 어느 누구도 그 말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가 어쩌다 그렇게 된 게 아니다, 반드시 그렇게 하겠다고 하자 어머니는 아버지가 남긴 시골의 땅이 문제라며 그 땅을 처분했다. 계속 그가 고집을 부리자 그 돈을 동생들에게 나누어주었고 그 다음에도 그가 고집을 꺾지 않자 의절을 선언했다. 그렇지만 전세계에서 가장 필사적으로 반대한 사람은 그가 결혼하려 한, 그리고 결국은 결혼한 여자, 재떨이였다. 그 여자는 자신이 서른이 되기도 전에 아홉 번 동거생활을 했고 열 번을 버림받았으며, 버린 사람들의 나이·출신지·직업·성격은 하도 많아서 일일이 기억조차 할 수 없다, 아이가 생기는 대로 낳았다면 한 다스는 되었을 거라고 말하면서 그의 청혼을 거부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스스로의 판단과 의지를 관철했다. 아니, 그런 게 가능했단 말입니까.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생김새부터 낭만적으로 보이는 흰머리 후배의 감탄. 그는 그에게서 술잔을 받아 마신 다음 대답했다. 세월이 달랐던가. 아니, 아니야. 난 할아버지한테서 허무주의, 아버지한테서 패배주의를 물려받았어. 그러면서도 마음 한편에는 그 반대인 에너지가 꿈틀거리고 있었지. 내 멋대로 살아보자, 그래서 망하더라도 떳떳이 보란 듯이 망해보자는 거였어. 그 여자가 스무살 넘어 아홉 번 동거하고 열 번 버림받은 건 그만큼 매력이 있었다는 거 아니겠나. 배운 건 없어도 글씨를 참 잘 썼어. 학교 선생인 내가 보기에도 웬만한 고등학생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문장력도 있고. 원래는 참 명랑하고 만나는 사람마다 이것저것 물어보거든. 그 술집에 간 선생들이란 선생들이 전부 다 학과별로 한 가지 이상은 가르쳐준 거야. 그러니 얼마나 똑똑하겠어. 그런데 말야 알고 보니까 내가 망해가는 데 그 여자를 이용한 거더라고. 술로만 망하는 건 단순하다고 생각한 걸까. 그때부터 여자의 표정이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끝에 가서 웃을지 울지는 예측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는 주전자에 다시 술을 채워오게 했다. 주인이 미적거리며 싫은 눈치를 보였지만 그는 가야금에는 눈도 돌리지 않았다. 한번 이야기하기 시작한 이상 끝을 본다는─그게 이야기든 술이든 인생이든 간에─오랜만에 찾아온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때 선배라는 사내가 난폭하게 주전자를 낚아채더니 자신의 잔에 술을 따라 마셨다. 그는 개의하지 않았다. 내가 그 여자를 이용했다…… 그건 나중에 알게 된 거고 그때는 그 여자를 정말로 사랑하는 줄 알았지. 그때만 해도 나는 매일 죽어라 하고 마셔대면서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술을 끊을 수 있다고 믿고 있었어. 그 여자는 저항을 하다가 하다가 안되니까 마지막으로 내가 술을 끊으면 원하는 대로 하겠다고 했지.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아니까 여자가 그런 조건을 건 게 아니었겠나. 난 술을 끊었어. 며칠뿐이었지만. 그런데 내가 정말로 그렇게 하니까 그 여자가 감동한 거야. 다음날 가방을 하나씩 들고 산동네에 있는 집에 세를 들었지.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있는 집이야. 낡은 슬레이트 지붕에 마당에는 쥐가 득시글대는 집이었지만 우리의 보금자리였어. 며칠은 정말 행복했지. 그런데 말이야 조그만 동네니까 소문이 금방 돌 거 아냐. 언덕받이에 있으니까 누가 누구하고 어떻게 사는지 관심만 있으면 다 볼 수 있는 거고. 동거를 시작하고 일주일도 안됐는데 교장이 불러. 선택을 하라는 거야. 교장은 자기 선생들이 전부 그 여자하고 무슨 관계가 있다고 생각했겠지. 내가 맹세하는데 그 여자, 아무한테나 몸을 쉽게 주진 않아. 그래도 세상이 어디 그런가. 그때부터 난 학교에만 가면 매일 교장 아니면 교감, 아니면 술을 전혀 못하는 고참 선생에게 한번 이상은 볶이는 거야. 나는 배우자를 선택하는 건 전적으로 개인의 자유다, 어떤 배우자를 선택했다고 해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그만둘 수는 없다고 버텼지. 생활이 문란하다고 어떤 놈이 감독기관에 투서를 하고 그 술집에 갔던 학부형들이 애들을 다른 반으로 옮겨가고…… 결국 술을 안 마실 수 없었지. 술을 마시니까 그 여자는 약속을 어겼다고 도망을 쳤어. 그 여자가 없어지면 그때까지 내가 세상과 싸워온 게 뭐가 돼. 그가 월급의 대부분, 혹은 그 이상을 술값으로 써버렸기 때문에 그의 집은 산동네 단칸방 셋집 그대로였다. 그의 여자는 그의 발소리가 나면 하루종일 수십 번은 데운 국과 밥을 다시 데운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술상을 봐오라고 다그친다. 그의 여자는 여름이나 겨울이나 늘 같은 실내복을 입었다. 살림은 적빈 그 자체였다. 그릇 하나 성한 게 없었고 젓가락은 깨끗하긴 했지만 짝이 맞지 않았다. 그가 매일 만만한 손님을 끌고 와서 교장과 교장이 대표하는 시시한 세상과 시시한 세상의 시비에 관한 고담준론으로 술상을 치며 밤을 밝히는 동안 싸늘한 윗목에서 그의 여자는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 그는 자신의 여자가 앉아 있던 자리를 볼 때마다 살의를 느꼈다. 그런데 도망을 가도 멀리 가는 게 아냐. 그 여자 고향이 충북 어디인데 역 앞에 기차소리가 잘 들리는 여관이 있어. 지금도 있을 거야. 오래돼서 허름해도 방은 엄청나게 많더군. 그런 데서도 손님이란 새끼들이 여자를 찾거든. 그 여자 찾으러 막연히 고향으로 갔다가 하룻밤 묵는데 옆방에서 치고박고 난리가 난 거야. 좀 있다가 누가 문을 두드려. 문을 열어보니까 그 여자야. 믿기지가 않더군. 그 여자도 나를 알아보고는 후닥닥 도망을 가는 거야. 그 여자, 수건이니 칫솔 같은 거 갖다주러 갔는데 술취한 놈이 뒤에서 덮치니까 반항하다가 어찌어찌해서 문을 열고 나온 거야. 구해달라고 옆방 문을 두드린 거지. 그런데 하필 그 방에 내가 있었던 거야. 나는 정신없이 그 여자를 잡으러 쫓아갔지. 그런데 뒤따라온 놈이 다리를 걸었어. 그 바람에 계단에서 떨어져서 다리가 부러져버렸어. 도망을 가던 그 여자가 내가 넘어지니까 돌아봐. 왜 주인에게 얻어맞은 개가 그렇잖아. 믿기지가 않는지 몇걸음 가까이 오다가 돌아가고 다시 몇걸음 더 오다가 돌아가곤 하더니 결국 내 곁으로 왔지. 옆에 꿇어앉아서 울더군. 병원에 가서 깁스를 하고 원래 생활로 돌아갔지. 한달 정도 목발을 짚고 다니는 동안에는 그 여자는 도망을 안 갔어. 나도 술을 못 마셨고. 목발을 떼면서 아무 생각없이 기념으로 가볍게 술을 마셨어. 그 여자는 나하고 같이 살게 된 다음에는 한 잔도 안 마셨거든. 오랜만에 마시니까 취할 거 아냐. 그 여자 취하니까 울더라구. 왜 우느냐고 물어도 대답을 안해. 할말이 없는지도 모르고, 너무 많아서 말을 못하는 건지도 모르고. 그런데 문제는 말야. 취해서 자는 나를 두고 다시 도망을 간 거야. 금방은 못 쫓아갔지. 다리가 불편하니까. 아, 정말 눈물이 다 나더군. 억울하고 원통해서 말이야. 술 마실 때마다 울었지. 다리가 대충 붙었다 싶자마자 쫓아갔어. 그런데 신기한 게, 잡으러 갔더니 그 여관에 그냥 있어. 끌고 오려고 하니까 제발 자기를 그냥 거기에 놔두라고 애원을 하더군. 그런 게 어디 있나. 그는 팬티 바람으로 길길이 뛰면서 너를 죽이겠다, 같이 죽자고 울부짖었다. 그때 그는 품위를 다소 잃었다. 오, 취하면 우는 여자들이 있다. 아무 이유도 없이. 취하면 자는 사람, 노래 부르는 사람, 싸움을 하는 사람, 한사코 집에 같이 가자고 남을 잡아끄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그는 비로소 정답을 찾아낸 듯해서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여자를 쳐다본다. 그러나 여자는 취할 정도로 마시지는 않은 듯하다. 그럼 왜 운 걸까. 그는 관성에 떠밀리듯 다음 이야기의 내용을 생각해낸다. 자전거. 여관 마당에 자전거가 있었어. 여관 주인이 다리를 붙잡고 늘어지면서 자전거를 보라는 거야. 내가 살던 곳에서 바로 오는 기차는 하루 한 대뿐이지. 그 기차가 오는 시간에 자전거를 타고 역전에 나가곤 했다는 거지. 산 지 얼마 안된 것 같은데 안장이 축 늘어지도록 닳았어. 여관에서 역까지 자전거를 타고 가면 십분쯤 걸릴까. 그 안장 때문에 그 여자를 죽이지 못했어. 자전거는 그 자리에서 부숴버렸지. 그날이 크리스마스였어. 그리고 다시 한 잔을 벌컥벌컥 마셨는지 그는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여자가 점점 고개를 기울여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끌고 와서는 기둥에다 묶었어. 손은 술잔을 잡을 수 있을 정도로만 풀어주고. 둘이서 이박삼일 동안 맥주 수백 병을 해치웠어. 워낙 술집에 오래 있었으니까 그 여자 먹었다 하면 술은 엄청나게 마시지. 마셨다 하면 울고. 술이 눈물로 다 빠져나와 변소도 별로 안 갔지만 그래도 갈 때는 줄을 허리에 묶어서 데려갔어. 술이 떨어지고 돈도 떨어지고 연탄도 떨어졌어. 그땐 막가고 있었지. 학교도 그만둔 건 물론이고 알던 사람들한테 손을 안 벌린 사람이 없었어. 정말 죽기보다 싫지만 집에 연락을 할 수밖에. 누이동생이 돈을 신문지에 싸들고 찾아왔어. 집안에 들일 수가 있나. 밖에 세운 채로 이야기를 하는데 어머니가 입원을 하셨는데 곧 돌아가실 것 같다더군. 어머니가 제정신이었다면 돈을 보낼 리가 없었지. 어머닌 그런 분이셨어. 평생을 시아버지와 남편의 술시중을 들면서 종처럼 살았지만 한번 그르다고 한 일은 절대로 생각을 안 바꿔. 그런데 말야. 어머니가 혼수상태에서도 우신다더군. 나를 보고 싶어한다는 거지. 이를테면 그 돈은, 내가 대충 상황을 정리하고 어머니 곁으로 돌아오라는 뜻으로 동생들이 마련한 것이겠지. 하지만 난 따라갈 수가 없었어. 누이동생을 그냥 보낼 수는 없어서 근처 식당에 가서 밥 한술 뜨게 하고 그 여자에게 먹이려고 냄비에 내장탕을 담아서 집으로 돌아왔지. 그랬는데 집안에서 고기 타는 냄새가 진동을 하더라고. 온 방안에 술병이 깔렸고. 그 여자가 어떻게 줄을 풀었는지는 몰라도 큰 대자로 방안에 누워 있었어. 바깥에서 얘기하는 걸 조금은 들었던 모양이지. 그 여자, 울면서 맹세했어. 내가 자신을 버리기 전에는 결코 자신이 먼저 도망치지 않겠다고. 어떻게 그걸 증명하느냐. 담배 한 갑을 다 피우면서 그 담뱃불로 여기 오른손 손목에서 팔꿈치까지 빈자리가 거의 없게 지졌어. 그 여자가 했어. 왼손잡이여서 오른팔에 한 거지. 그때부터 그 여자를 재떨이라고 불렀어. 이틀 뒤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이 왔지.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중독자와 중독자 아닌 사람들 모두 술잔을 비웠다. 잔을 내려놓자마자 후배인 김이 묵묵히 그 잔을 채웠다. 술은 그가 평소에 엄두를 못 내는 진짜 소주를 찻잎에 들이부어 차의 성분을 우려낸 것이었다. 알코올 도수 45도. 그는 알코올 도수를 눈으로 확인한 적이 없었다. 그가 확인하기 전에 동석한 사람들이 호들갑을 떨며 확인을 해주는 게 보통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무도 확인을 해주지 않았다. 울었다는 이야기가 거듭되어서 여자가 울었나.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그는 생각한다. 어머니 생각에 잠시 목울대를 만지며 입술을 뻐끔거리던 그는 곧 재떨이 이야기를 계속했다. 재떨이는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었어. 그때까지의 나를 포함해서, 사람들은 그 여자를 원하기만 했지 사랑하지는 않았거든. 나는 생각했지. 나한테 남아 있는 마지막 동전은 저 여자한테 준다. 재떨이가 받겠다면. 나는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데도 가지 않은 놈이야. 그때 처음 죽을 생각을 했어. 그러면 어머니한테 곧바로, 빨리 가는 거 아니겠어. 어떻게 죽느냐. 아까 얘기한 것처럼 술로 살아온 놈이 존경하는 술을 자살의 도구로 쓰겠다는 건방진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어. 그는 어머니가 보내준 돈을 쌌던 신문지로 식칼을 둘둘 말았다. 어디로 가고 싶은가. 그가 물었다. 평생 한번 가보고 싶어했던 곳은 도대체 어디냐, 재떨이. 내가 데려다주겠다. 재떨이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맑은 웃음소리를 냈다. 그는 자신이 가르치던 학생들이 오가는 길거리에서 재떨이에게 입을 맞추었다.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도 그의 정신은 더없이 맑았다. 그의 뜻과는 반대로 떨리던 수의근(隨意筋)도 떨리지 않았다. 거센 전류가 그에게서 재떨이에게로, 재떨이에게서 그에게로 오가는 듯했다. 두 사람은 택시를 타고 도청소재지로 나왔다. 싸라기눈이 뿌리는 길을 팔짱을 끼고 걸어다녔다. 시내에서 가장 비싸다고 소문이 난 옷가게 앞에서 재떨이의 걸음이 잠시 느려졌다. 그는 재떨이의 팔을 끌고 눈부신 쇼윈도우 안의 매장으로 들어섰다. 그는 쇼윈도우에 걸린 바바리코트를 가져오게 했고 재떨이에게 입게 했다. 수줍게 웃으며 몸을 한바퀴 돌리는 재떨이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워 보였다. 그들은 시내에서 가장 비싼 호텔로 갔다. 시내에서 가장 비싼 술을 파는 스탠드바 앞에서 그의 걸음이 잠시 느려졌다. 재떨이가 그의 팔을 잡아끌어 두 사람은 화려한 조명 아래 빛나는 양주 전시대를 넘어 스탠드바에 앉았다. 거기서 두 사람은 술잔을 부딪치며 우아하게 칵테일을 마셨다.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양복 주머니에 신문으로 둘둘 만 식칼을 꽂은 알코올 중독자와 자그마한 몸에 어울리지 않는 긴 바바리코트를 입은 재떨이를 부러워하는 듯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껴안고 지상에서 가장 비싼 호텔의 가장 비싼 방에 들어가 가장 비싼 침대에 몸을 던졌다. 그런데 말이야. 난 할 수가 없었어. 그는 솔직히 말했다. 서지를 않아. 한번도 서지를 않았어. 제기랄, 마지막까지 그 모양이야. 그때 선배가 말했다. 알코올이나 마약 중독자들이 쎅스 때문에 중독이 된다는 얘기는 왜 안한 거요. 더 큰 쾌락을 추구하다가, 더 오래 하려고 하다가 결국은 폐인 된다는 얘기는 왜 처음부터 하지 않았어. 그는 그 말에는 대꾸하지 않았다. 멍한 눈으로 나머지 이야기를 계속했다. 사실 난 재떨이하고 한번도 제대로 못 했다네. 그러니 애도 없었고. 재떨이는 한마디로 낙이 없었지. 새벽에 팔을 긋고 의식을 잃기 전에 그 여자를 깨웠지. 가라고 했지. 너는 이제 자유다. 나는 너를 버린다. 미안하다. 이젠 가라. 소뇌가 마비되는 듯 그의 혀는 어눌해졌고 말도 느려졌다. 재떨이는 울면서 자긴 이제 자유니까 가고 말고는 자기 마음이라더군. 난 한 번으로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팔목을 네댓 번 그었어. 그뒤에 나는 도마가 됐지. 재떨이가 가면서 나를 그렇게 불렀어. 나는 재떨이, 당신은 도마. 돌아오지 않았어. 아직도. 다시 긴 침묵이 흘렀다. 그 역시 입을 다물고 있었기 때문에 술로 친다면 그 침묵의 도수는 50도 이상 될 듯했다. 그 다음엔 어떻게 됐습니까. 흰머리가 많은 후배가 싸움을 걸려는 듯한 선배를 제지하며 물었다. 그는 술잔을 치켜들었다. 중뇌가 알코올에 침윤된 듯, 기자는 벽에 기대앉은 채 코를 골고 있었다. 난 내 발로 걸어가서 정신과 치료도 받았고 단주협회에도 들어갔지. 어느날 정신이 들어서 달력을 보니까 그 여자하고 그 호텔에 간 날로부터 정확하게 오년이 지났더라구. 기념으로 그날만큼은 술을 마시기로 했어. 하여튼 난 지금은 중독자가 아니야. 단주자들 모임에도 열심히 나가지. 당신은 지금 술을 마시잖아. 겨우 대뇌가 해방되었을 뿐인 친구가 시비조로 말했다. 난 그날 이후로 술을 마시지 않았소. 지금 마시는 건 뭐냐구. 오늘이 바로 그날이오. 내가 재떨이를 보낸 날. 지금 술을 마시는 건 재떨이요. 재떨이가 나를 기억하고 있다면 오늘은 하루 쉴 거요. 일년에 딱 하루씩 도마는 재떨이가 되고 재떨이는 도마가 되는 거지. 나는 비겁한 놈이오. 일년에 딱 하루만 그 지옥을 경험하는 것이니. 정말이지 난 술이 무섭고 끔찍하고 싫소. 지금도 재떨이는 세상의 술을 다 마셔서 없애고 있을 거요. 나를 대신해서 술에게 복수하는 거지. 단주자들 모임에서는 다시 술을 마시는 건 허용하지 않거든. 그래도 나는 봐줘. 오늘 나는 재떨이니까. 안 봐주면 어떻게 되는데요. 거긴 임의단체니까 들어가고 싶으면 들어가고 나오고 싶으면 나오면 그만 아니에요. 나는 거기 있는 사람들을 좋아해. 거기서 만나는 사람들은 서로를 끔찍하게 생각하지. 거의 다 죽었다가 살아나온 사람들이니까. 거기를 안 나가면 사람 같은 사람을 못 만날 것 같아. 나온다는 건 상상도 해본 적이 없어. 그러다가 문득 그는 여자에게 물었다. 왜 우는 거요. 여자는 오도카니 앉아 있다. 끝내 대답을 하지 않을 모양이다. ============================================================================== [강변야화] 굴러온돌 박힌돌 (1) 전원주택인지 뭔지,집을 지으면서 맨처음 맞닥뜨린 골칫거리는 동네 사람들과의 융화였다．전형적인 농촌 마을의 전형적인 여름낮에는 사람의 전형이라는 게 보이지 않았다．그러니까 융화를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집안에서 낮잠을 자다가도 포클레인이며 레미콘트럭이 내는 요란한 소리를 들으면 잠이 깰만도 하련만 거기에 대해 항의를 하는 사람 하나 없었다．중장비가 땅을 파헤치고 길을 닦는 광경을 큰 구경거리가 아니라고 해도 아이들 하나둘은 나와볼 법 하건만 역시 코끝 하나 비치지 않는 걸 보면 어른들이 나가지 못하게 단속하는게 분명했다．요컨대 공동체인 마을에 전원주택을 짓는 자들은 이방인이요,침입자이며 질서 교란자이다．이장이나 반장이나 새마을지도자처럼 동네에서 일을 맡고 있는 사람들이 공론을 세워 무언가 조건을 내걸고 올법도 하겠는데 그런 일 역시 없었다．어떻든 동네 사람 하나 제대로 보지도 않은 채 장마 뒤에 시작된 기초공사가 별탈없이 마무리 되었고 외벽공사가 시작됐다．외벽공사에는 인부들이 몇명 동원됐다．우선 기거만 할 정도로 간단한 조립식 건물이지만 명색이 건축주라고 새참이며 담배,막걸리를 간간이 내고 벽이 제대로 올라가는지 볼 겸해서 공사장에 나간지 사흘째．해가 기울고 하루 일이 끝났는가 싶었는데 한 인부가 씩씩거리면서 다가왔다． “아,참 나 더러워서．이 놈의 동네에서는 씻지도 못하겠네” “왜 그러는데” “아,등목을 하는데 뒷집 담너머에서 웬 할아버지가 넘겨다 보고 있지 뭐야” “할아버지는 남자 아냐? 다 같은 사내끼리 뭐가 부끄럽다고 그래” “글쎄,그게 아니라니까요” 인부는 건장한 구릿빛 팔뚝에서 물기를 훑으면서,팔뚝이 아깝게 새처럼 재재거렸다． “왜 훌떡 벗고 등목을 하느냐는 거야．아이 씨 그럼 등목하면서 옷 입고 하냐 그랬지．그랬더니 평소에도 웃통을 벗고 일을 하지 않느냐 이거야．그럼 이렇게 날이 환장하게 더운데 정장 차려 입고 일해야 해요? 그랬더니 우리 동네는 원래 양반 동네라,그것도 보통 양반이 아니고 이씨왕가와 같은 성을 쓰는 왕족이 사는 동네니까 그러면 안된다．부녀자들도 있는데 창피하지도 않으냐．애들 배울까 겁난다,이거야．이런 제기,우린 그런 거 모르니까 정정당당하게 사장님한테 이야기하라 말이야．무식한 우리한테 이러지 말고．그랬더만 까불지 말라는 거야．까불지 말래．자기도 옛날에 보안대 나왔다는 거야,보안대．그것도 하사관 출신이라 이거지” “누가?뒷집 할아버지가?” “아니,할배가 또 있더만．뒷집 담 뒤에 바글바글해．한 할배는 해병대,한 할배는 헌병대,한 할배는 공수부대,한 할배는 백마고지 용사랴…” 알고보니 그들은 쉼없이 우리를 감시하고 있었던 것이었다．담너머에서,지붕 밑에서,헛간 뒤에서 들일을 하면서 훔쳐보고 넘겨다 보고 들여다 보고 예의주시하고 있었다．그렇게 해서 알게 된 사실을 수집하여 결정적인 트집거리를 잡고있었던 것이다．드디어 `웃통을 벗고 등목을 하는 게 미풍양속에 어긋난다'는 합의에 도달해서 적임자인 보안대 출신을 내세웠던 것이고,그래서 동네사람들과의 융화가 시작되었다．그날 당장 주스만 여러 통 나갔다． (2) 이사를 와보니 우리 동네에서 제일 현대적으로 지은 집의 주인은 40대 초반의 전씨．그는 전문가다．이름이 `문가'가 아니라 모든 방면에 전문가를 자처하고 있다．우선 그는 집과 관련된 여러가지 일에 남다른 조예가 있다．울창한 쥐똥나무 울타리가 둘러싼 그의 집 마당에는 농촌에서는 보기 드물게 잔디밭이 깔려 있고 군데군데 바위와 노송이 보기 좋게 어울려 있다．모두 그가 하나씩 가져다 가꾼 것이다．집밖 빈터에는 그의 작업공간이 있다．거기에는 웬만한 카센터 뺨치게 많은 장비가 있어 바퀴달린 것 치고 어지간히 고장난 것은 그의 손에 고쳐진다．집안에 들어서면 벽마다 걸려 있는 고풍스러운 장식품,오래된 집기 따위의 골동품에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다．그 역시 길바닥에 굴러 다니는 것들을 돈들이지 않고 전문가적인 솜씨로 손질한 것이다．어느날 집에다 옛날집에서 나온 문짝을 갖다 쓸 일이 있어 이미 그걸 가지고 있는 그에게 자문을 구했다． “그런 거야 저기 저 충주가는 국도변에 가면 가게들이 수두룩하니까? 얼마든지 구할 수 있지．내가 잘 가는 집이 있으니까 거기를 가 봐．문 두 짝에 이만원이면 뒤집어 써．』 그러면서 그는 그 가게의 약도를 그려주었다． 『그런데 우리가 가면 바가지를 쓰지 않을까．』 우리가 걱정을 하자 그는 전문가끼리는 통하는 법이다,전문가가 아니면 전문가인 척하면 된다고 했다． 『어떻게?』 그러자 그는 자꾸 뭐라고 그러면 한쪽 눈을 감으면서 「전!」이라구 하면 된다고 했다．그게 그 업계의 전문가들끼리 통하는 암호라는 것이다． 하여튼 그의 말대로 골동품이며 수석을 파는 가게에 가서 문짝을 골랐다．다행히 짝이 맞는 것이 있어 가격을 물었더니 오만원을 달라고 했다．우리는 사실 인테리어 하는 사람인데 딴 사람 집에 설치를 해주려는 것이라고 말하고 이만원에 하자고 했다．그랬더니 얼굴이 반 이상 덮이게 수염을 기른 가게 주인은 두말도 않고 문짝을 도로 가져가는 것이었다．안되겠군．한쪽 눈을 감았다．그리고 『전!』 가게 주인은 우리를 쳐다 보았다．우리는 아직 못 알아들었나 싶어 계속해서 『전,전!』 하고 외쳤다．가게 주인은 도대체 뭐하자는 거냐고 물었다．그제야 우리는 전씨에게 속았다는 것을 깨닫고 처음부터 다시 흥정을 시작해서 간신히 만원을 깎을 수 있었다．문짝을 싣고 차에 오른 뒤 우리는 물었다． 『우리 동네에 전씨라고 있는데 모르슈? 아저씨처럼 수염을 길렀는데,자주 온다던 걸．』 가게 주인은 그제야 우리의 위대한 전문가를 기억해 냈다．문짝을 사러 와서 두 짝을 사만원에 고른 전 씨,돈을 깎아주지 않자 얼른 벽에 세워져 있던 다른 문짝을 싣더니 차를 몰고 달아나더라는 것이다．야,이 도둑놈아! 소리치며 쫓아가자 유리창을 내린 전씨, 『전! 전! 전!』 끼룩거리면서 가버렸다고 한다． 『그 사람 당신네 동네 살아유? 어느 동네유?』 우리는 『아무 동네도 아니유!』 하면서 전씨처럼 도망치지 않을 수 없었다. (3) 들일을 하면서 마신 한두 잔의 막걸리에 발동이 걸려 초저녁부터 술판이 벌어졌다．그래도 내일을 생각하면 도시에서처럼 열두 시,한 시를 넘기기는 힘든 일이어서 열한 시가 조금 넘자 자연스럽게 술판이 끝나나 했는데,느닷없이 밖에서 누군가 창을 두드렸다．유리 넘어 어둠 속에 어릿어릿 보이는 얼굴은 장국영이었다． “들어가도 돼유?” 우리는 일제히 얼굴을 마주보았다．뼛속까지 농부이지만 노는 일에도 누구 못지 않게 열심인 이장과 도시에서 살다온 지 얼마되지 않아 이장에게서 농사일을 배우는 한 씨,그저 노는 것만 좋아하는 나,읍내에 도배가게를 연 기술자 이씨가 우리였다． 『어쩌지?』 『어쩌긴,들어오라구 해야지．어이,영화배우．들어와．』 이장이 그래도 어른스럽게 대처했다．우리가 장국영을 꺼리는 이유는 따로 없다．평소에는 얌전한 데 술만 취하면 다른 술자리를 기웃거리며 밤이라도 샐 위인이기 때문이다．그냥 기웃거리는 게 아니라 꼭 트집을 잡아 무슨 사단을 일으킨다．장국영이 밖에서 흙투성이가 된 농구화 끈을 푸는 동안 우리는 눈짓 손짓 발짓으로 재빨리 작전을 짰다．남아 있는 술을 감추고 트집을 잡지 못하도록 물샐틈없이 우리끼리 놀자는 것이었다．그 순간부터 우리는 돌아가면서 노래를 하기 시작했다．나머지 사람은 열심히 반주를 해가며 나지도 않는 신바람을 냈다．장국영이 어렵사리 신발끈을 풀고 안에 들어왔지만 우리는 쳐다보지도 않았다．오로지 노래에만 열중했다． 『여봐유．여봐유,아,여봐유!』 장국영이 계속 불렀지만 우리는 일치단결해서 노래를 부르고 박수를 치고 손바닥이 아프도록 상을 두드렸다．삼팔선의 봄,짠짜자잔짠짠짠… 『아,나도 끼워줘!』 장국영이 소리를 질렀다．이장이 고개를 돌렸다． 『얌마．여긴 술판이 아니고 노래판이야．내 너를 사십년 동안 봤어도 노래하는 건 한 번도 못봤다．고맙게 듣기나 해!』 우리는 계속했다．다음은 이씨．천드응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 우리 님아．으싸으싸으싸으싸． 『나도 할 수 있단 말유．있슈!』 장국영이 울상을 하고 소리쳤지만 우리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다음은 앵금리의 최고 카아수,이장니임,돌리시고．하나둘셋넷… 그때였다．느닷없이 우리의 머리 위에서 음정도 박자도 맞지 않는 괴상한 노래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나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우리는 노래를 그치지 않을 수 없었다．장국영이 선 채로 시커먼 두 손을 앞에 모으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넓다 하리오．어머님의 희생은 가이없어라． 그 노래 앞에서야 아무리 개망나니라 해도 숙연해지지 않을 도리가 있으랴．노래가 끝난 뒤 이장이 입을 열었다． 『장국영．노래 잘 하네．또 하나 해』 장국영은 털썩 자리에 앉더니 물에 빠졌다 나온 개처럼 고개를 흔들며 소리쳤다． 『나 아는 노래는 그거밖에 없슈．좋으면 열 번이고 백 번이고 더 할께』 그의 노래를 막으려니 술을 바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 소설 쓰는 인간 나는 지금 소설을 쓰려 하고 있다. 자기 살아 온 걸 쓰면 소설 몇 권은 충분히 나온다 는 사람은 나도 지겹게 많이 봤다. 또 소설처럼 사는 인간도 만났고 소설을 써야 먹고 사는 인간하고도 이야기해 봤다. 나로 말하자면 소설을 쓸 수밖에 없는 인간이다. 장난이 아니다. 거창하게 시작했다가 한 권도 못쓰고 땡할 사람이 아니란 말이다. 나는 이때까지 살면서 한 번 마음먹고 시작한 일은 끝을 봤다. 중간에 어물어물 그만두는 건 체질상 맞지 않는다. 사 실 나는 이때까지 소설은 물론이고 소설 비슷한 편지도 써본 적 없다. 왜 내가 소설을 쓸 수밖에 없는 인간이냐. 도대체 왜 쓰느냐. 나는 세상에 잘못 알려진 우리의 세계를 바로 알리고 싶다. 우리의 세계가 뭐냐. 우리 세 계는 네 가지 요소로 이루어졌다. 춤 춤방 남자 여자. 내가 춤에 관해 알게 된 건 우리 세계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게 말하듯이 친구를 통해서였다. 나는 원래 통신판매 대리점의 총무였다. 대리점에서는 각 가정에 전단을 뿌리든가 광고를 해서 주로 건강보조식품 같은 걸 판매했는데 사장이 자형이어서 자동으로 능력을 인정받았 다. 삼 년을 정신없이 사람들이 혹할 만한 상품을 고르고 주문 받고 포장해서 배달하는 일 을 하고 나니 총알도 안 맞았는데 가슴에 바람구멍이 나는 거 같더라. 물론 나도 그 동안에 남처럼 결혼도 하고 중고차도 장만했다. 그렇지만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고 할 일 은 무엇이고 내 인생이 무엇인가 하는 의문은 일단 생기고 나서는 목구멍 속의 질긴 가래처 럼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근 십여 년 만에 고등학교 동창을 새벽 포장마차 에서 우연히 만나게 됐다. 술잔을 두세번 부딪치고 나서 걔는 이런 말을 했다. 넌 고등하교 다닐 때 내가 가장 부러워한 애였어. 나야 뭐 다 어정쩡했지. 뭐 하나 특별히 잘하는 것도 없고 말이야. 그래서 지금도 이렇게 어정쩡하게 살고 있는 거 아니니. 나는 일 등만 하는 친구를 부러워한 적은 없어. 우리 동창중에서 삼 년 내내 아버지 차로 등교한 군수 아들도 있었고 또 삼 년 내내 일 등만 하다가 대학 가서 곧바로 고시 패스한 놈도 있지. 나는 그런 놈들을 부러워하지도 않았어. 그놈들은 그야말로 별종이야. 나도 별종 이었는데 안 좋은 쪽으로 별종이지. 반에서 등록금도 제일 늦게 낼 정도로 가난하고 공부는 꼴찌고 사고 쳐서 학생과에 제일 많이 불려 가는 게 나였어. 그런데 그놈들은 나를 별종 보 듯 하면서 저희가 별종인지는 몰라. 나는 네가 부러웠어. 평범해 보이는 게 그렇게 부럽더라 구. 네 말대로 나는 평범했다. 지금도 평범하지 뭐. 처음 만나서 술을 한 잔 하면서 나눈 얘기는 그런 평범한 얘기였다. 그렇지만 걔는 결코 평범해 보이지 않았다. 걔는 내가 값을 짐작할 수도 없는 수제 양복을 입고 있었고 기사가 딸린 최고급 승용차를 포장마차 옆에 대기시켜 놓고 있었다. 나는 고등학교도 간신히 마칠 정도로 가난하고 열등생인데다 희망이 없던 걔가 어떻게 갓 설흔 나이에 그렇게 빨리 출세 했는지 궁금했다. 자연스럽게 걔 직업이며 살아 온 얘기를 들으려 했지만 걔는 금방 이야기 해 줄 것처럼 하다가도 교묘하게 핵심을 피해 나가곤 했다. 그렇지만 그게 기분 나쁜 건 아 니었다. 그는 평범한 내가 어떻게 평범하게 사는지 궁금해했고 나는 내가 사는 방식 그대로 를 얘기해 주었다. 그렇다고 먼저 이야기한 내가 손해를 보았다거나 그래서 기분이 나쁘다 거나 하는 느낌은 없었다. 걔는 무척 바빠 보였다. 술을 마시는 동안에도 버릇처럼 시계를 들여다보았고 당시로서는 드문 카폰으로 그 새벽 시간에 전화가 걸려 오기도 했다. 정말 나 하고 있는게 세상에서 가장 즐겁고 하고 싶은 일인데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게 안타깝다는 식이었다. 그것만 빼면 우린 늘 기분좋게 마셨고 기분좋게 헤어졌다. 술값은 그쪽에서 늘 부 담했고 몇 번은 택시비까지 주었다. 그게 한두 번은 신경이 쓰였지만 결코 기분이 나쁜 건 아니었다. 그렇게 일주일에 한두 번씩 사무실 근처의 포장마차에서 걔를 만나는 일이 두어 달쯤 계속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문득 걔한테서 연락이 끊어졌다. 그러고 보니 나는 그때 까지 걔 연락처도 모르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 빼고는 언제나 그쪽에서 먼저 연락을 해 왔던 것이다.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며 새벽 포장마차에서 혼자 앉아 술잔을 기울이다 보 면 버림받은 사람처럼 서글퍼지기까지 했다. 걔가 다시 연락을 해왔을 때는 정말 무슨 일이 든 할 것 같은 심정이었다. 야 이거 정말 미안하다. 좀 바빴다. 무슨 사업인데. 뭐가 잘 안 풀려. 그걸 물었던 게 내 인생을 평범한 것에서 별종의 것으로 바꿔 놓았다. 걔는 나를 한참 쳐 다보았다. 그 눈길만 두고 보면 원래 그놈은 그렇게 나쁜 놈은 아니다. 걔는 마침 내게 부탁 을 하려던 참이었다고 했다. 워낙 타고난 재주가 있어서 그런지 춤을 금방 배웠다 사회에 나와서 시험 삼아 카바레에 갔는데 첫 날부터 엄청나게 인기가 좋았다 재미 삼아 다니다가 보니 춤을 따로 배우려는 여자들을 만나게 됐다. 카바레에서 가르칠 수도 있지만 거긴 원래 수많은 제비들이 진을 치고 있어서 눈치가 보인다 그렇다고 순수한 뜻으로 춤을 배우려는 여자들을 무작정 뿌리칠 수도 없어서 장소를 물색중이다 혹시 네가 아는 데가 있으면 소개 를 좀 해달라고 했다. 나는 우리 사무실이 물건을 쌓아 두기 위해 공간은 크게 얻었어도 보 통 때는 대개 비어 있다고 이야기했다. 그러자 그 친구는 내 손을 잡으면서 바로 그런 데를 찾고 있다면서 사용료는 충분히 지불할 테니 하루 몇 시간만 쓰게 해달라고 했다. 나는 그 부탁을 거절했다가 걔가 다시 내게 연락을 해오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돼서 무조건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걔는 내가 부담스러워할 걸 알았는지 일단 한 달 정도만 해보자고 했다. 정작 사무실 주인인 자형에서 이야기하기가 힘들었는데 자형은 뜻밖에도 잘됐다고 했 다. 그렇지 않아도 상품 홍보 차원에서 무슨 행사라도 벌이려고 했다면서 실험 삼아 한번 해보라는 거였다. 한달 예정한 실험은 두 달이 가도 끝나지 않아도 세 달이 넘어서야 끝났 다. 네 달째부터는 실험이 아니라 공식적인 행사가 됐다. 소문이 살살 퍼지면서 정식 무도장 에 가는 건 겁이 나도 됐다. 소문이 살살 퍼지면서 정식 무도장에 가는 건 겁이 나도 춤은 배우고 싶은 여자들이 몰려들었다. 그 여자들이 사무실 한쪽에 쌓여 있는 상품을 한두 개씩 사들고 가주니까 사장도 좋아했다. 남자 파트너는 늘 부족했기 때문에 나는 처음부터 춤을 배우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 스텝을 밟는 순간부터 전기가 온몸을 지나가는 것 같더라. 왜 진작에 춤을 몰랐는지 그때까지 춤을 모르고 산 게 억울해서 한숨이 다 나왔다. 하긴 그 전까지는 나 역시 남들처 럼 춤을 붉은 등불 아래 푸른 등불 아래 불륜의 남녀가 끌어 안고 도는 것만으로 알아 왔던 게 사실이었다. 성인 남녀가 추는 춤을 사교 댄스라고 한다. 하지만 외국에서는 대여섯 살 먹은 애들도 사교 댄스를 배운다. 남녀가 춤을 추는 건 외국에서는 손잡고 걸어가는 것만큼이나 흔한 일 이다. 외교관들도 외국 나가기 전에 사교 댄스를 배운다고 들었다. 이렇게 외국에서는 건전 한 사교 댄스가 우리나라에서 찬 바람을 맞게 된 건 자유부인인가 하는 유부녀가 집과 남편 을 버리고 춤바람이 나서 신세를 망친다는 소설이 나오면서부터다. 또 그 무렵에 박인수라 는 사교 댄스의 선구자가 나타나서 여대생 70여 명과 사귀는 바람에 특히 유부남들이 사교 댄스를 엄청나게 오해했다.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유부남들이 사교 댄스가 제 마누라 를 잡아먹기라도 한 것처럼 죄악시했고 그때부터 사교 댄스는 컴컴하고 좁은 데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밝고 넓은 데서 사교를 위해 춤을 추던 것이 숨어서 바짝 붙어서 추는 춤이 됐다. 그러니까 진짜 안 생길 일도 생기고 억울해서라도 바람을 더 피운다. 그 바람에 사람 들 인식이 더 나빠지고 . 이게 얼마나 한심한 악순환이냐. 지금은 그래도 많이 좋아졌다. 볼 룸 댄스가 버젓한 자치단체의 문화강좌의 정식 과목이 되고 건전한 여가를 권장하는 사회단 체에서 강의 요청이 몰려 온다. 올림픽에도 스포츠 댄스라는 정식 종목이 생겨 나는 세상이다. 이젠 춤만 잘 추면 올림픽 에서 메달을 딸 수 있다는 거다. 스포츠 댄스에는 젊은 애들이 마구잡이로 흔들어 대는 트 위스트나 고고 블루스 디스코 같은 건 안 들어간다. 그건 춤도 아니라는 거다. 올림픽도 카 바레에서 추는 진짜 춤을 인정한다. 이 중에서도 자이브는 우리의 지르박처럼 지터벅이 조 상인데 영국으로 가서 발전한 춤으로 지르박하고는 전혀 성질이 다르다. 이런 게 좀 아쉽다. 우리 국력이 조금 더 발전했다면 우리의 지르박이 자이브를 제치고 정식 종목이 됐을 거고 그러면 볼 것도 없이 박인수의 후배들이 메달을 몽땅 따올 건데. 불룸댄스는 알고 보면 예절 그 자체다. 테크닉보다 예절을 더 중요시한다. 진짜 춤을 추는 사람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신사다. 제대로 된 선생은 제자에게 먼저 예절부터 가르친다. 그 다음이 스텝이다. 제대로 된 선생을 만나 춤을 여섯 달쯤 배우면 스텝이 몸에 익는다. 3년쯤 춤을 배우면 자기 스텝이 생긴다. 이때는 처음 만나는 사람하고 춤을 춰도 욕을 안 먹을 정도가 된다. 상 대가 초보면 초보인 대로 선수면 선수인 대로 상대에 맞춰 춤을 출 수가 있는 거다.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게 있다. 자기 스텝이 생겼다고 응용을 하네 뭐네 하면서 멋대로 춤을 추다 보 면 스텝이 개판이 된다. 이 바보를 교정하는 데 드는 시간과 돈이 처음부터 가르치는 것과 맞먹는다. 요즘 애들은 춤 배우는 데 3년은커녕 서너 달만 배우면 금방 카바레에 가서 더러 운 방법으로 떼돈 벌 궁리부터 한다. 못 가게 하는 선생한테 면도칼 갖다 대는 놈까지 있 단다. 요런 놈들은 얼굴이 좀 반반하고 몸매가 쪽 빠진 걸 밑천으로 알고 있지만 춤의 세계 는 춤이 밑천일 뿐이다. 정통으로 춤을 배워서 5년이 되면 춤을 좀 안다고 할 수 있겠다. 제 나름대로 예술을 추 구할 수 있다는 거다. 이 수준에서 무도계의 일원으로 들어가든가 못 들어가든가 하는 거다. 춤을 배우기 시작하자 내게는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놀랍고 짜릿하고 새로운 세계가 나타 났다. 그때부터 나한테는 오로지 춤밖에 보이지 않았다. 걸어가는 사람들은 모두 스텝을 밟 고 있는 것 같았다. 잠자기 전에 천정에서 스텝이 오락가락했고 화장실에 앉아서도 손으로 는 보이지 않는 상대를 끌어 안고 발바닥으로 스텝을 밟았다. 아침은 해의 독무대로 열리고 밤은 별의 군무가 벌어지는 무대였다. 한마디로 나는 춤에 미쳐 버렸다. 내가 3년쯤 춤을 배웠을 때 내게 처음 춤을 가르쳐 준 고등학교 동창 놈이 감옥에 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때는 그 친구와 나는 만나지도 않았다. 걔 사업이 고급승용차를 타고 비싼 양복을 입고 사업한다고 사기 쳐가면서 골 빈 여자들에게 용돈을 얻어 쓰는 일이라는 걸 알 게 되어서 그 때문에 실망해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춤의 세계로 가는 길을 가르쳐 준 게 그 친구였으니 걔가 제비든 오리든 상관없이 나는 속으로 고마워하고 있었다. 그 친구하고 헤어지게 된 건 춤에 대한 생각이 달라서였다. 내가 춤을 배운 지 6개월쯤 됐을 때였다. 내 가 춤에 빠져서 일을 그 전처럼 안 하니까 자형이 잔소리를 해대기 시작했다. 결국 자형과 대판 싸우고 대리점 총무 자리를 정리한 날이었다. 내가 더 이상 사무실을 무도장으로 쓸 수 없게 되었다. 그렇지만 난 전혀 괴롭지 않고 외롭지 않으며 두렵지 않다 오히려 홀가분 하게 춤을 배울 수 있겠다는 희망으로 꽉 차있다. 춤은 이제 나의 인생이다. 나는 결코 후 회하지 않을거더, 우리 더 열심히 춤을 추면서 함께 앞날을 개척해 나가자고 내가 열변을 토하는 동안 그 친군는 내내 술잔만 뒤집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주머니에서 때가 묻었는지 기름을 묻혔는지는 몰라도 하여간 윤이 반질반질 나는 구슬 같은 걸 꺼냈다. 이게 뭔지 알아. 글쎄. 호두 같구만. 이걸 바지 주머니 옆에 있는 특수한 주머니에 넣고 아줌마들 허벅지를 슬슬 문질러 주면 효과가 백 퍼센트지. 돈이 쭐쭐 흘러내리게 하는 거야 이게. 그때 나는 걔 정체를 확실히 알 것 같더라. 그래서. 너 가져. 걔는 네 개의 호두 중에서 두 개를 나한테 내밀었다. 그놈에게는 진짜 제비에게는 전혀 쓸모가 없는 멍청한 우정과 맹목적인 의리가 있었다. 나는 잠자코 그 호구를 받아 들고서 포장마차의 카바이드 불빛에 비춰 보았다. 고마워해야 하는데 전혀 고맙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화가 나기 시작했다. 점점 화가 났다. 그냥 가만히 앉아 있다가는 미칠 것 같았다. 가 새끼야. 뭐. 가버리란 말야. 춤을 모독하는 놈. 야 이 미친 놈아. 춤이 무슨 예술이냐. 다 그게 그거지.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 세상 잘 나갈 때 한 몫 챙겨야지. 넌 늙어서 무르팍 떨어 가면서 이 짓 할래. 그러니까 너는 저질 제비 짓밖에 못하는 거야 임마 꺼져. 네 마빡이 호두마냥 박살나기 전에. 그러면서 나는 유혹적으로 반들거리는 호두를 구두로 콱 밟아 박살내 버렸다. 그 친구는 에라이 미친 놈 늦바람 나 환장한 놈 얼마나 잘 되는지 보자 어쩌고 저쩌고 혀 꼬부라진 소 리로 중얼거리더니 제 운전기사와 어깨동무를 하고는 가버렸다. 그리고 예정된 순서에 따라 고등학교 때 학생과에 끌려가는 듯이 감옥에 갔다. 사기 감금 폭행 성폭행 협박 따위의 죄 명을 쇠사슬처럼 줄줄이 달고서. 예술을 모독하는 인간 고등학교 사회생활 춤 제비에서도 열등생이 가는 코스였다. 그 친구하고 헤어지고 나서 나는 본격적으로 춤선생을 찾아 다니기 시작했다. 어디에 유 명한 춤 선생이 있다면 삼고초래 아니 삼세 번 초대를 해서라도 문전에 발을 들이밀고 세숫 물까지 바쳐 가면서 배우고 또 배웠다. 지금 나를 키웠다는 춤 선생들이 전국적으로 수십 이다. 나는 그 사람들 다 인정한다. 그렇지만 그 춤선생들이 전성기에도 지금 나보다는 못 했다는 걸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나를 사교 댄슬의 황제니 왕제비니 하고 부르던 사람들 은 다 안다. 나를 사교 댄스의 황제니 왕제비니 하고 부르던 사람들은 내가 발바닥에 물집 이 생기고 쌍코피가 터지도록 노력한 것을 모르고 있다. 그렇게 3년 동안 한눈도 팔지 않고 오로지 춤만 배운 뒤에 나는 서서히 춤방에 나가기 시작했다. 춤방에도 여러 가지가 있지만 진짜 춤은 카바레에서만 출 수 있다. 카바레의 조상은 모르 긴 몰라도 왈츠의 황제 요한 스트라우스가 지휘하는 악단이 반주하고 최고급 샴페인의 분수 속에서 잘생긴 귀족과 요염한 숙녀가 춤을 추는 궁전일 거다. 가끔 외국 영화에서 일이백 년 전 구라파의 궁전 무도회를 보여주는데 나는 그런 영화가 나왔다. 하면 만사 제쳐놓고 남 먼저 보려고 달려갔다. 휘황한 샹들리에와 영롱하게 반짝이는 보석 원색물감을 풀어 놓 은 듯한 드레스를 휘감은 미인들 흰 가발을 쓴 시종 검정 예복에 우아한 스텝으로 춤을 추 는 귀족들은 언제나 크나큰 감동을 안겨 주었다. 줄거리가 문제가 아니었다. 그런 장면을 볼 때마다 나는 잃어버린 낙원을 보는 듯 목이 메였고 대책 없이 울먹이기도 했다. 이처럼 나 는 뼛속까지 춤을 좋아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정상에 오를 수가 없었을 것이다. 죽도록 좋아한다고 해서 다 성공하는 건 아니다. 그걸 기본으로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사 람이 정상에 오른다. 재주가 없어도 게으르면 소성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대성할 수는 없 다. 춤에서 운이 좋은 소성은 이른바 제비다. 왜 제비라고 부르나. 춤을 출 때 입는 정장이 연미복도 입지 않고 빈둥거리는 주제에 제비라고 하면 더럽게 싫어하고 선생이니 무도예술 가라고 불러 달라고 한다. 제비들은 카바레에 오는 여자들을 춤으로 홀리고 여관으로 데려 간 뒤 몸을 뺏고 남편에게 알린다고 협박해서 용돈을 뜯어 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워낙 그렇게 알려져 있다 보니 아예 제비가 되기 위해 춤을 배우는 녀석들까지 생겨 난다. 제비 들의 밥이 되는 여자들도 그 사실을 빤히 알고 있을 텐데도 어제도 오늘도 오고 또 와서 내 일치까지 합쳐 넘어간다. 내가 한마디하고 싶은 건 이 부분이다. 제비가 되고 싶어서 춤을 배우고 춤방에 나가서 여자를 유혹하는 짓이나 제비라는 걸 알면서도 같이 즐기고 넘어가는 것이나 피장파장이라는 것이다. 나는 한번도 내 입으로 춤추다 만난 여자에게 용돈을 달라 고 해본 적이 없다. 춤이 좋아 추을 추러 춤바에 갔다가 춤으로 만난 여자들에게는 언제나 최선을 다했다. 그러니까 여자들이 알아서 돈을 갖다 주더라. 용돈이 아니라 집 몇 채를 사 고도 남을 뭉터기 돈을 갖다 주었다. 한창 때 내 하루 일과는 이랬다. 나는 하루도 새벽 운동을 빠뜨리지 않았다. 내가 회원권 을 가진 헬스클럽에는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예술 등등 각계의 유력인사들이 많이 왔다. 나 는 어떤 분야의 유명인사며 권위자와 비교해도 지지 않을 건강과 육체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만큼 나는 몸을 철저히 관리했다. 나한테는 몸이 자산이고 수단이며 목적이었다. 말이 나 왔으니 말인데 사실 춤만한 운동도 따로 없다. 운동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면 배달된 조간신문을 샅샅이 읽어 간밤에 별다른 사고나 없었 는지 시중의 흐름이나 여론의 움직임을 알아 둔다. 언제 어떤 사람을 만나도 대화에 막힘이 없으려면 나 자신이 열심히 공부를 해야 한다. 나는 기본적으로 신문 두 종 시사주간지 하 나 이상 월간지 둘을 정기구독하고 때에 따라서는 전문서적도 사서 봤다. 워낙 많은 사람 특히 여성들을 최선을 다해 상대하다 보니 내 지식의 폭은 유흥업에서 꽃집 식당 의류 액세 사리 사무직 등등 여성들이 진출해서 성공을 거둘 수 있는 분야는 물론이고 중장비 임대 광 업처럼 여성 진출 인력이 극히 드문 분야에도 전문가는 못 돼도 일반적인 수준은 가볍게 뛰 어넘는 범위까지 넓어졌다. 여자들 특히 돈 있는 여자들은 무식한 제비는 질색을 한다. 이건 정말이다. 무식한 사람하고는 아예 상대를 안 한다. 너절한 춤솜씨하고 상판대기만 믿고 제 비짓 하다가는 오래 못 가 감옥간다. 무식하니까 싫다는데도 쫓아다니면서 무리를 하게 되 는 거다. 점심 때가 되면 일정을 체크한 뒤에 좋아하는 음식을 찾아 잘한다는 식당에 들른다. 나중 에 다시 올 것에 대비해 식당의 인상이나 지리 음식의 질을 체크해 둔다. 아무리 잘하는 음 식점이라도 두 번 이상 연달아 가서 주인에게 특별한 인상을 남기는 일은 삼간다. 자 이제 점심을 먹었으니 슬슬 춤방으로 가서 새로운 상대와 인생을 구가해야 할 차례다. 돈을 뜯자 는게 아니다. 같이 즐기자는 게 중요하다. 춤방은 오후 두 시부터 나편족들이 퇴근하기 전까 지가 제일 황금기다. 춤방으로 들어간다. 어두컴컴한 조명에 눈이 익으면 나느 어떤 여자가 있나 홀을 한 바퀴 둘러본다. 처음 온 듯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든가 친구 손목에서 일 미터 이상 떨어지지 않으 려는 여자가 일차 대상이다. 혼자서도 미친 듯이 흔들어 대거나 운동을 하듯이 춤을 추면서 땀을 흘려 대는 여자 정말 춤에 미쳐서 아무하고나 부둥켜 안고 돌아 가려고 하는 여자는 사절이다. 내가 한번 찍은 상대는 다른 제비들이 접근을 할 수 없다는 게 불문율이다. 나는 보통 제비가 아니라 왕제비였던 것이다. 따라서 내가 고르는 상대는 나와 수준이 맞아야 한 다. 커다란 진주목걸이나 누런 금빛이 번쩍거리는 장신구를 한 여자는 내 취향이 아니다. 이 런 여자들은 목걸이나 장신구가 재산의 전부인 경우가 많다. 나는 겉으로 드러나는 부와 감 추어진 알짜배기를 구별하는 데 누구보다도 자신이 있다. 춤을 추면서 알짜배기를 구별하는 데 누구보다도 자신이 있다. 춤을 추면서 상대의 목덜미 바로 아래 옷을 달린 메이커를 보 면 구십 퍼센트는 그 여자의 경제 사정을 알 수 있다. 속옷까지 확인하면 확실해진다. 생소 한 외국 상표 이름은 십 년 넘게 살아 온 남편보다도 초보 제비가 훨씬 더 잘 안다. 작아서 눈에 잘 띄지 않지만 독특하고 잘 어울리는 장신구를 한 여자도 물이 좋다. 상대가 어떤 수 준이라도 그 수준에 맞추는 건 기본이다. 일단 여자를 고르면 어디까지나 신사적으로 춤을 청하고 춤을 출 때도 신사적이고 춤을 추고 나서도 신사라는 호감을 사도록 노력한다. 그렇 게 하려면 나부터 나를 신사라고 생각해야 한다. 사실 나는 신사다. 예절 그 자체인 사교 댄 스를 나처럼 정통으로 배우면 신사가 안 될 수가 없다. 춤이 끝나고 나서도 애프터 신청을 할 때도 어디까지나 신사답게 정중하게 한다. 내가 신청을 해서 안 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 다. 신청을 안 받아 줄 사람 같으면 아예 신청을 하지도 않았고 춤도 추지 안았을 테니까. 애프터로 차를 마시러 가게 되면 기사를 호출한다. 한때는 감옥에 간 내 친구처럼 월급 기사를 고용한 적도 있었는데 몇 달 안 가서 약점 같지도 않은 약점을 찾아 내서 제비 잡는 독사처럼 설치는 꼴을 보고는 필요할 때 부르는 쪽으로 바꿨다. 뭐 하는 분이세요. 이런 데서 만날 분 같지가 않아서요. 차를 타고 가다 보면 그런 질문을 받는 게 보통이다. 나는 상대에 따라서 내가 전에 만났 던 여성들이 가지고 있던 직업 가운데 한두 개를 댄다. 전문용어는 얼마든지 주워 댈 수 있 고 업계의 흐름 같은 건 한 시간 이상을 떠들어 댈 수 있다. 하지만 그 이상을 알려고 하는 여자는 거의 없다. 꼭 믿으란 법도 없고 믿어 달라는 것도 아니다. 나는 굳이 상대의 직업을 캐묻지 않는다. 묻지 않아도 이야기를 해주는 게 보통이다. 나는 그 이야기가 정말인지 아닌 지 한두 마디만 듣고도 금방 알 수 있다. 거짓말이라고 해도 상관하지 않는다. 나는 제비 중 의 왕제비이고 그 여성은 제비가 득실대는 춤방에서 춤을 출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어 왔다 제비를 만난 거니까 그 범위 안에서 생각하고 움직이는 게 좋다. 커피를 마시는 장소로는 특급 호텔 커피숍을 이용한다. 호텔로 들어서면 여자들은 반신반의 하는 표정으로 나를 돌 아본다. 아니 만나자마자 호텔로 직행하는 거야 이렇게 빨라 그런 표정도 있고 평생 처음 와보는 호화로운 곳이라서 얼떨떨해 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오로지 최선을 다할 뿐이다. 커 피를 마시면서 물건이 되겠는가 아닌가 판단한다. 안 된다 싶으면 그때까지 들어간 기사 일 당과 커피값만 날리면 된다. 이제 가능성이 있는 상대와 식당으로 간다. 물론 맛있고 정갈하 고 유명한 내가 점심 먹으러 다니면서 미리 점찍어 둔 식당이면서 나를 나는 사람이 없는 특히 다른 제비가 없는 식당이다. 거기서 최고의 요리를 최고로 입맛에 맞게 시간과 돈을 아끼지 않고 먹는다. 식사를 같이 하게 되면 그때부터는 사이가 훨씬 가까워진다. 밥을 나눠 먹고도 친밀감이 조성이 안 되는 상개가 있으면 여기서 끝. 식대만 날리면 되니까. 그 다음 에는 예정된 대로 술을 마시러 간다. 물론 일류의 술집에 가서 일류의 술을 마신다. 비용은 내가 모두 현금으로 부담한다. 나는 최선을 다하는 신사이므로. 상대가 술에 취해 집에 못 들어가든가 늦게 들어가게 되는 경우가 생기면 나는 역시 최선을 다해 숙박업소로 모신다. 그 다음 과정이야 제비 아닌 사람도 다 아는 거니까 상상에 맡긴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도 최선을 다해 봉사한다. 이 과정이 단 하루 만에 끝날 때도 있고 며칠이 걸릴 때도 있다. 이 렇게 한 사이클이 지나면 나는 한동안 춤방에 나가지 않고 그 여자에게 집중한다. 경치 좋 은 곳 열정적인 사랑을 나눌 러브호텔이 있는 곳 맛있는 식당이 있는 곳으로 다니며 신뢰와 사랑을 쌓아 나간다. 그 동안에도 절대 계산대 앞에서 여성이 핸드백을 열게 하는 일이 없 다. 시간이 흐른다. 눈이 오고 비가 오고 바람이 몰아 치는 날도 있다. 따라서 피치 못할 사 정으로 못 만나게 되기도 한다. 꼭 그때쯤 내 사업 자금이 모자라게 된다. 자금이 모자라면 나는 할 수 없이 연락을 끊는다. 열렬하게 나를 원하는 상대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게 연 락을 해온다. 나는 그동안 바빠서 연락할 수 없었다. 요즘 자금 흐름이 나쁘다고 말한다. 융 자를 받아야 하는데 은행 측에서 망설이고 있다. 물론 금방 좋아질 것이며 전혀 걱정할 게 없다고 한다. 하지만 몸을 빼기가 어렵다고 한다. 연락을 끊고 나서 빠르면 몇 시간 뒤 아니 면 며칠 뒤 내 상대가 간곡하게 때론 억지까지 써가며 만나자고 한다. 나는 그러고 싶지만 지금은 은행에 가서 고개를 숙이고 융자를 부탁해야 한다. 좋아지면 보자고 한다. 정말 내 사정이 그렇다. 만나면 최고급 호텔 최고급 식당 최고급 술집으로 가야 하는데 내가 가진 현금은 바닥이 난 것이다. 상대는 은행으로 가기 전 자기를 잠깐이라도 만나 달라고 애원하 다시피 한다. 나는 몇 번을 망설이다가 한숨을 쉬며 그러겠다고 한다. 사업이냐 사랑이냐. 나보고 고르라면 언제나 사랑을 고를 것이다. 내 사랑을 만난다. 내 행색은 초췌하다. 하찮 은 자금 때문에 속을 끓인 탓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동안에도 핸드폰은 쉬지 않고 울려 빚을 독촉해 댄다. 어쩔 수 없이 시계를 보기도 한다. 그때마다 미안한 건 난데도 상대는 나보다 더 미안해 한다. 그때마다 미안한 건 난데도 상대는 나보다 더 미안해 한다. 헤어질 무렵 내 사랑은 핸드백을 열어 흰 봉투를 내놓는다. 그리곤 내가 만류할 겨를도 없 이 도망치듯 가버린다. 나는 쓸쓸히 봉투를 바라보다가 내용물을 확인하지도 않고 주머니에 집어 넣는다. 그 봉투에서 나온 돈으로 나지도 않고 주머니에 집어 넣는다. 그 봉투에서 나 온 돈으로 나는 아파트 다섯 채를 샀고 고급 맞춤양복 백여 벌 골프 세트 배기량 3천6백 씨 씨의 고급 승용차를 장만했으며 아이들 과외비도 대주었다. 여기에 무슨 협박이 필요하며 감금 폭행 사기 공갈 성폭행 혼인빙자간음은 또 무슨 말인가. 물론 내게도 몇 개의 전과가 있다. 왕제비로 태어난 사람은 없으니까 처음엔 나도 실수를 하긴 했다. 하지만 왕제비가 된 이후에는 한번도 감옥에 가지 않았다. 춤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어떤 분야에서도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정상에 올라갈 수가 없다. 춤바람이 나면 춤이 직업이 아닌 한 자기 분야에서 정상에 오를 수 없다. 정상 일보 직전에 서 춤바람이 나든가 나 같은 제비를 만나서 좌절할 수밖에 없는 상대를 보면서 안타깝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만난 여성들 가운데 대부분의 여성은 일정한 직업이 없었다. 남편이 벌어 다 주는 것을 가지고 춤방에 나오든가 아니면 이혼 위자료를 두둑히 챙겼다든가 하는 게 보 통이었다. 그런 여성들이 갖다 주는 돈을 받는 건 사실이지 덜 켕기더라. 자기 분야의 사업 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풀러 나왔든지 집 안에 갇혀서 애 키우고 남편 뒷바라지하다가 어지 간히 여유가 생기고 할 일이 없어서 나왔든지 간에 나는 춤방에서 만난 여인들은 똑같이 최 선을 다해 상대했다. 그래도 혹시 미안한 마음을 느낀 적은 없느냐. 있긴 있다. 아직 기억이 나는 사람은 중부시장에서 멸치 좌판을 벌여서 자식들 공부시키고 무능한 남 편을 먹여 살리다 지루한 인생을 극복하기 일보 직전에 참지 못하고 춤방에 나왔다는 나의 아흔 여덟 번째 사랑이다. 그 여자는 맨 처음 내 사업자금으로 백만 원을 가져왔다. 나는 그 백만 원이 멸치를 몇 마리나 팔아야 나오는지 몰랐다. 물론 나는 그 돈이 적다고 서운해 하 지는 않았다. 사업은 사업이니까 나는 딱 그 액수만큼만 성실했다. 그 다음에 만났을 때 나 의 사랑은 목덜미까지 빨개지면서 봉투를 내밀었는데 집에 와서 꺼내 보니 백오십만 원쯤 됐다. 대부분이 헌 돈이었고 내 사랑이 시장에 앉아 밥을 먹다가 고추장을 떨어뜨린 오천 원짜리까지 있었다. 그때 미안했던 것도 아니다. 나는 내가 사람을 잠못 고른 것을 후회하느 라 좀 바빴으니까. 마지막으로 그 여자가 내게 가져온 돈은 시장의 가게 권리금으로 받은 돈이었다. 권리금에서 아이들 등록금과 큰딸의 혼수비용 자신이 돌아갈 때 탈 지하철 표값 을 뺀 돈이었다. 그게 얼마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 여자는 자신이 춤방에 드나들던 게 들통났다 남편이 술만 마시면서 며칠을 울더니 이젠 자신이 공사판에라도 나가서 벌겠다 모 든 것을 용서하니 집으로 돌아오라고 했다고 그 여자는 말했다. 그 말을 들으면서 나는 봉 투를 집어 넣고는 원래 예정한 대로 결별을 선언했다. 그 여자에게서 더 이상 나올 게 없어 서 헤어지자고 한 게 아니다. 그 여자가 수억짜리 복권을 탔다고 해도 헤어지는 건 마찬가 지였을 것이다. 일어서려다 보니 그 여자는 탁자에 떨어진 눈물을 뽀드득 소리나게 문지르 며 그 옆에 새로운 눈물방울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그때 나는 그 집이 하필 싸구려 중국집 이라는 게 신경이 쓰였다. 내가 미안했던 건 그거다. 자기 돈으로는 자장면 한 그릇도 사먹 을 용기가 없는 사람과의 이별의 장소로 하필 싸구려 식당을 택한 게 미안했던 것이다. 생활에 여유가 생기고 춤이 생계와는 큰 상관이 없는 일이되자 내게 이상한 감정이 찾아 들었다. 진정 춤은 무엇이고 위대한 제비는 뭔가. 진정한 내 인생의 목표는 무엇인가. 어느 때부터인가 혼자서 그런 질문을 뇌까리며 술잔을 기울이는 일이 잦아졌다. 모든 것이 시들 해지고 일에도 의욕이 없어졌다. 그랬을 때 우연히 어느 포장마차에서 내 친구가 말한 별종 동창 군수 아들을 만나기도 했다. 무슨 건물의 청원경찰을 하고 있다고 했는데 인생이 공허 하다가 한숨을 푹푹 쉬었다. 좀 안돼 보이긴 했지만 나는 내 친구같이 고등학교 때 부러워 한 친구를 경쟁자로 만드는 바보 같은 짓을 하지는 않았다. 그냥 한 잔 술을 나누고 깨끗이 헤어졌다. 나는 권태를 이기기 위해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춤을 추러 갔다. 진정한 나를 찾기 위해서 춤을 추러 갔다. 나한테는 춤이 직업이고 취미였고 이상이었다. 춤말고는 나의 고뇌를 잊어버릴 방법이 없었다. 나는 나를 아는 사람이 없는 이름없는 변두리의 허름한 춤방을 찾아갔다. 거기서 나는 한 여자를 알게 됐다. 나는 그 여자가 분식집을 계속할 수 있 도록 도와 주었고 분식집을 일식집으로 바꾸도록 해주었다. 그 여자는 일식집을 개업하자마 자 개업 축하화환의 꽃이 시들기도 전에 팔아먹고 도망갔다. 그 여자가 진짜 제비 잡는 꽃 뱀이었는지 지금도 모르겠다. 진심으로 도와주고 싶었고 가련한 그녀에게서 일찍이 경험하 지 못한 풋풋한 사랑마저 느꼈다. 당하는 줄도 모르고 당했다. 어수룩한 놈이 당수 팔 단이 라더니 프로 같지 않은 진짜 프로였다. 그 덕분에 나는 집을 한 채 팔고 한 채는 저당을 잡혀야 했다. 집에도 선후배 동료 그 누구에게 말도 할 수 없어서 속으로만 앓았다. 제비나 꽃뱀이나 춤방을 무대로 사업을 하는 인간의 공통점은 그 사업으로 한 몫을 쥐었 다 해도 언젠가는 춤방으로 돌아온다는 거다. 송충이가 솔잎을 떠나서 살 수 없듯이 춤으로 흥한 인간은 춤으로 망해서 결국 춤판으로 돌아온다. 나는 그 여자를 찾기 위해 어리숙한 중년 사업가 행세를 하며 그 여자가 망해서 돌아올 만한 변두리의 보잘것없는 춤방을 찾아 다녔다. 그러다가 나는 또 꽃뱀에게 걸렸다. 함께 여관을 들어갔다가 먼저 샤워를 하고 나오 니 오빠라고 하는 영낙없는 제비가 사진기와 야구방망이를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결혼 날짜 받아 놓은 순진한 내 동생 몸 망치고 단물 빨아 먹고 이제 어쩔겨. 내가 아무리 왕제비라 한들 왕제비 면허가 있는 것도 아니요 면허가 있다 한들 사교 댄스 의 황제가 변두리 여관에서 새파란 애와 재미를 보려다가 새파란 애들한테 잡혔다는 게 알 려지면 그 순간부터 내 인생은 끝장이었다. 나는 애들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말 하기도 창피하다. 나는 알몸으로 엎드려 뻗쳐 같은 군대 시절에도 받아 보지 못한 온갖 기 합을 다 받았고 통장을 압수당했으며 각서를 쓴 다음 수천만 원을 또 뜯겼다. 몽둥이찜질 안 당한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 덕분에 저당 잡혔던 집을 아예 넘기게 되었다. 거기서 비 싼 세상 공부를 하고 깨닫게 된 진히가 있다. 마음먹고 계획적으로 덤벼들면 아무리 날고 기는 왕제비라도 초짜 꽃뱀에게 당할 수 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천하에 없는 열녀 라도 제비가 마음먹고 달려들면 무너지게 되어 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건 춤판에서의 이야기이다. 또 다행인지 불행인지 춤판은 인생의 축소판이다. 나는 지금 소설을 쓰려고 한다. 일선에서 물러났다고는 해도 나는 아직 나이 오십도 먹지 않은 앞날이 창창한 사나이다. 은퇴하고 나서도 음악만 흘러나오면 발이 움직이는 걸 참느 라 무진 애를 먹었다. 내 딴에는 이런저런 생각을 잊기 위해 조용히 머리를 정리하기 위해 한동안 소설만 수백 권을 읽었다. 그런데 읽다 보니 아무것도 모르면서 세상을 다 산 것처 럼 폼만 잡는 한심한 소설이 너무 많더라. 그래서 내가 직접 소설을 써야겠닥 마음먹게 됐 다. 세상에는 소설처럼 사는 인간도 있고 소설을 써야 먹고 사는 당신 같은 인간까지 있는 데 나로 말하면 소설을 쓸 수밖에 없는 인간이다. 춤으로 인생의 황금기를 보낸 한 사나이 왕제비로 알려진 인생 그러나 이제 원고지 앞에 돌아와 알몸으로 앉아 있는 인간의 이야기 를. 제목 어느 왕제비의 인생. 내 운명을 바꾼 호두알 두 쪽. 이때까지 내가 최선을 다해 여자들을 상대해 왔듯이 소설을 상대하는 데도 최선을 다하련 다.